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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펌)

행복한세상을만드는사람들 2009. 8. 19. 14:55

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


  8월은 광복절이 있어서 애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무엇이 애국인가에 대해서는 세대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정치적 입장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애국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니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남강 이승훈이 떠오른다.

  가난한 시골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6세 때 상점의 점원이 되었는데, 10여 년 후 유기행상 ·공장경영 등으로 재산을 모았으나, 1894년 청 ·일전쟁 때 재산을 모두 잃었다. 다시 공장을 일으켜 서울 ·인천 등지를 내왕하는 도매상을 시작, 일약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99년 돈으로 벼슬을 사서 수릉참봉(水陵參奉)이 되었다.

  오산면 용동에 본가를 짓고 승천재(陞薦齋)를 세워 인근의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당시 관서지방의 자산가들을 연결하여 큰 민족자본을 만들어 침투해 오는 외국자본을 막아야 한다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내세웠다. 이탈리아 사람과 제휴,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 ·일전쟁의 발발로 파산하였다. 그 후 시골에 칩거하면서 나라가 기울어 감을 걱정하다 늦게나마 면학의 길을 찾던 중 1907년 평양 ‘쾌재정’에서의 안창호의 교육진흥론 연설에 크게 감동받아, 당장 상투를 자르고 금주단연을 실천에 옮기고 승천재를 개축하여 ‘강명의숙’을 열었다. 또한 신민회 발기에 참여한 후 다시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10년 평양에 마산자기회사를 세웠다.

  그 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오산학교의 교육목표를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하여 세웠다. 1911년 5월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9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15년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관련인사의 참여문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3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출옥, 그 해 일본시찰을 하고 돌아와 총독부와 교섭하여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 재직 중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신앙의 능력은 실천함에 있다. 애국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애국은 어떤 실천을 요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