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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조셉 캠벨/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이윤기옮김)

행복한세상을만드는사람들 2009. 9. 4. 16:07

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 이윤기 옮김


 

1. 이 책을 읽게 된 동기

  신화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신화를 읽으면 감칠맛 나는 재미가 있다. 때로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침잠하게 하기도 하며, 절망 중에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지혜를 주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주기도 한다.

  “신화의 힘”을 읽게 된 동기는 주어진 과제여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조셉 캠벨에 대한 흥미 때문이다. 그의 연륜과 신화에 대한 박식함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 책의 선택의 이유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저자가 세계 각국의 신화를 연구하면서 기독교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이해하고 있는가가 궁금했고, 또한 기독교 신앙과 신화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회는 신화에 대해서 점점 무지해져가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사회과학적인 틀과 개념들을 받아들여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을 현대인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노력을 하는 기독교 신앙인들보다는 그러한 작업을 이해하기 못하며, 나아가 몰지각할 정도로 매도하고 거부하는 신앙인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국내 기독교 교회를 보면 건강한 의미에서의 신화적 표현들이나 상징들보다는 건강치 못한 신화적 표현들과 상징들이 만연되어 있고, 엉터리같은 해석들이 난무하면서 기독교 교회의 질을 점점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화의 힘”은 캠벨과 모이어스가 대담하는 형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은 책이었다. 캠벨은 대담과정을 통해서 신화가 어떻게 형성되며, 신화를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원형을 찾아가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많은 상징과 은유들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 삶의 모든 면면들을 신인동형론적 관점, 인간과 동물, 때로는 바람과 비와 불 등등의 소재를 통해 그리고 있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사실적인 예들을 들어가면서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다. 특히 영웅 신화 이야기들이 어떻게 인간의 자기완성의 과정과 관련이 있는가를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 관심을 끌었다.

  2. 새로운 발견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더욱 새롭게 와 닿게 된 것은 성서 속의 신화적 이야기들이 다른 여러 지역의 신화들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창세기의 창조신화의 경우 남자와 여자, 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등의 이야기 소재들은 매우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른 신화들이 다분히 여성적이며 모성적인 반면에 성서의 창조신화에서는 여성이 매우 폄하되고 있다는 지적이 생소하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실제로 성서 전체를 보면 여성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인식일 것이다. 사람 수를 계수하는 경우에도 어린아이와 여성은 제외되며, 여성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고대 히브리 문화권에서 여성은 노예와 같이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데, 이러한 인식이 이미 창조 신화에 숨어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많은 종교학자들의 지적처럼 유사한 내용들이 과연 같은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비교신화학 혹은 비교종교학의 연구결과는 서로간의 많은 유사점들을 발견하지만, 과연 그것들이 같은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인데, 이러한 견해조차 편협한 기독교적 관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켐벨에 의해 인용되고 있는 구약성서의 내용과 불교의 유사성은 타락 이야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문의 열매를 따먹은 후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는 데,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화염검과 그룹으로 방어하게 하는데, 이것을 불교의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사천왕상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과 이해 또한 매우 독특해서 이원성의 과실, 통합에서의 쫓겨남, 생명나무와 영생의 나무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룹 사이를 지나야 한다는 해석, 그리스도와 십자가와의 연결하는 점 등이 독특하며, 또한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라는 그의 말은 한편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되면서도 너무나 전통적인 기독교적 해석과 다른 것이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반면에 수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 각 지역의 신화들은 어쩌면 그 지역에 터잡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간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패턴들이며, 그 독특성과 유일성이 인정되어야만 더욱 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적 관점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교나 신화들을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종교들은 진리가 아니다. 혹은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꾸며낸 이야기들일 뿐이다.” 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신화나 다른 종교를 연구해보면 해 볼수록 기독교의 편협성과 패권주의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이다. 캠벨은 이 책 곳곳에 성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때로는 구체적으로 성성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은연중에 그러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은 인디언 신화의 다양성과 단순한 것 같은 그 상징의 깊이와 의미의 깊음이다. 인디언 신화가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는 것은 캠벨이 미국인이라는 점 때문일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숫자 1132에 관한 이야기이다. 캠벨이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읽으면서 알게 된 1132라는 숫자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인데, 참 특이하였다. 그 숫자는 로마서 11장 32절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캠벨은 이 경험을 통해 신비한 체험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신화는 다른 한편으로 고대의 죽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디지털 화 된 현재에도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지 루카스가 캠벨의 영향을 받아 만든 영화가 스타 워즈라고 했는데, 이 책에는 그 영화가 종종 인용된다. 신화가 디지털화되어 새로운 이야기처럼 만들어진 소재처럼 영화된 경우는 많다. 매트릭스 시리즈과 그렇고, 반지의 제왕도 모티브는 같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기계화되어도 결국에는 신화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화 자체가 바로 인간의 꿈을 담고 있는 것이고,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아가고자 하는 원형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인데, 인간이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계를 발명하고, 심지어는 인간 복제까지 하려는 모든 시도 뒤에는 바로 신화적인 소원 즉 인류 공통의 원형적 욕망을 이루려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신화가 이카루스 신화이다. 너무 태양에 가까이 가서 밀납이 녹아 날개를 잃어 죽게 된 아들 이카루스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아버지의 경우는 인간에게 기술과 과학의 양면성을 깨닫게 해 주는 신화이다. 야뉴스의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앞과 뒤를 보면서 즉, 과거를 반성하면서 미래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캠벨은 “신화의 힘”을 통해서 다양한 신화들이 우리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캠벨의 의도대로 신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 것은 큰 도움이다.


  3. 딜레마 - 성서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신화를 공부하면서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과 갈등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신화와 종교조차도 하등적인 것과 고등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고등종교의 조건으로 계시에 의한 경전과 윤리와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 말해왔다. 기독교회는 오래전부터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로 여겼으며, 이것이 과학의 발달과 어우러지면서 신화가 아닌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또 불변하는 진실처럼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 특히 문화인류학과 신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기독교회 안에서도 성서의 이야기들을 수많은 신화 중의 하나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전통과 입장과 충돌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잠간 언급한 창세기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선 신화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신화가 던져주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혹은 그 신화를 통해 보는 세상이 어떤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그렇지 않다. 전통적으로는 일단 인간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명령을 어긴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인 해석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의 의미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양극성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느냐 어기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에덴 동산에는 또다른 나무가 있다. 그것은 생명나무이다. 하나님은 그 생명나무에 손을 댈까 하여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다. 그리고 저주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는 땀을 흘리며 땅을 일궈야 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이다. 그런데 신화적인 해석은 이것은 다만 인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특히 농경사회를 배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또 있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다.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시기가 난 가인은 아벨을 죽인다. 전통적인 해석은 이 이야기를 결코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대결이며 결과적으로 유목사회의 승리기사로 읽지 않는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그렇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신약성서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너무나 정치적이고 교리적인 해석으로만 치우쳐 있다. 영웅신화적인 관점에서 예수 이야기를 읽으면 전형적인 한 인간의 성장발달과 자신의 원형을 찾아가는 전인격의 성장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교회 안에서 신화적인 관점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그 의미를 메시지로 던진다면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잘못된 성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지금 교회 안에서 보여지고 있는 성서해석이 오히려 자의적이며 잘못된 해석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성서를 은유로 읽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적으로 읽으면서 문자주의에 빠질 때 성서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이 되는 경우를 수없이 보게된다.

  이러한 오류들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결과이다. 신화를 단순히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여 가볍게 취급하거나 무시하는 데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점점 건강한 의미에서의 신화가 사라지고 더불어서 상징도 사라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목회자들이 까운을 벗어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까운만 벗어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례와 예식이 단순화 혹은 간편화 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는 성만찬도 마지 못해 집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스스로 거룩성과 신비를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모든 신화는 성과 속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경외심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신앙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깨닫게 해주며, 결과적으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매튜 폭스의 말대로 현대 사회는 신화를 잃어버린 세대이다. 신화를 잃어버린 세대, 신화적인 이야기, 상징성을 잃어버린 신앙은 영원한 것과 궁극적인 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고 전해 줄 수 없다. 그 순간 그것은 죽은 신앙이 되는 것이다. 죽은 신앙의 신앙의 대상 역시 죽은 대상이 될 것이다. 


  4. 미완성

  신화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그동안 지나치게 과학주의와 사실주의에 빠져서 신화를 잃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동시에 신화와 상징을 잃어버린 교회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울이 말한 “거짓된 신화”는 우리가 읽고 배워야 할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감추어진 건강치 못한 신화인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버려야 할 신화이다.

  성서를 읽을 때 문화인류학적인 관점과 신화학적인 관점에서 읽고 해석한다면 더욱 풍부한 의미들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제는 과감하게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한 결과물들이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004.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