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태도(예언자의 소명유형)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태도
골3:12-17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 중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소명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소명’이란 ‘왕의 부름, 혹은 신적인 부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첫 단계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보편적 은총으로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 역사하시는 그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는 그에 응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각각의 사람에게 특별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의 태도와 유형이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서인석 신부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부르셨을 때에 그 유형과 응답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 군대식 소명유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가라’명령하시면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일어나서 떠나갔다”(3:3) 등의 표현이 그것입니다. 호세아, 아브라함 등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그 명령을 이행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군대식 소명 유형은 하나님의 지상명령권을 매우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자유인으로 그 명령을 외면할 수도 있으나 결국은 그에 순종합니다.
둘째, 주인-마름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네”라고 대답하지만,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에스겔, 기드온, 모세가 그랬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변명하고 때로는 항변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끈기 있게 설득하십니다. 결국에는 예언자가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십니다.
셋째, 왕-조언자 유형이 있습니다. 미가야, 이사야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으신 보좌에서 사명자를 물색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그 때에 지원자가 나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하달합니다. “가라, 가서 말하라.”
넷째, 스승-제자 유형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소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명을 하달하십니다. 그러면 명령을 이행합니다. 이러한 유형은 단계적인 소명과정이기도 합니다.
20세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성자라 일컬음을 받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목사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명과정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습니다.
“1905년 10월 13일 금요일, 몇 통의 편지를 보냈다. 장차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 적도지방에 가려는 계획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내가 품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 이 동기의 실마리는 학생시절로 되돌아가게 된다. 내 주위에 많은 사람이 고뇌와 고난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만이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인 것을 느꼈다. 벌써 초등학교 시절에 동창생의 비참한 가정의 형편을 보고, 이것은 군스바흐의 목사 집 아들의 이상적이며 안락한 가정생활과 견주어 볼 때 나의 마음에 깊이 느낀 바가 있었던 것이다. -----
1896년 성령강림절 아침, 군스바흐에서 눈을 떴을 때 문득 나는 나의 이 행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여기에 대해 나 자신도 무엇인가 남에게 주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는 고요하고 깊은 사색을 한 후 기상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그 후부터는 직접 인간에 대한 봉사에 일신을 바치자’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막8:35)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곰곰히 생각한 때는 많았으나 이제 비로소 그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밖에서 누리는 행복만 아니라 마음의 행복까지를 얻었던 것이다. -------
1904년 녹색표지로 된 선교보고서의 글 ‘콩고 지방의 선교사에 대하여 결핍된 것’은 가봉 지역에 선교를 위한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맺음글 ‘사람들이여, 교회는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읽고 나서 나는 이제까지 하려던 일을 조용히 계속 할 수 있었다. ------ 앞으로 할 일은 사랑의 종교에 관하여 더 이상 설교 형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3년 수난일 오후, 나와 아내는 군스바흐를 떠났다.------ 아프리카에 도착한 첫날 아침, 약품이며 의료기구의 포장도 풀기 전에 나는 환자들에게 둘러싸였다.”(‘나의 사랑과 생명을 다하여’, 알버트 슈바이처 지음, 김은목 역, 서울 : 미문출판사, 1967)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하나님이 부르실 때! 여러분의 응답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소명 유형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 모두가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명한 여러분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