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가족상담소/신앙의사람들
종교개혁자 쯔빙글리 (1484.1.1~1531.10.11)
행복한세상을만드는사람들
2010. 2. 24. 14:33
쯔빙글리 (1484.1.1~1531.10.11)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로서 츠빙글리는 마을 행정관이었던 자유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인 마르가레테 마일리는 투르가우에 있는 피싱겐 대수도원장의 누이였고, 츠빙글리의 아저씨인 바르톨로메우스 츠빙글리는 빌트하우스의 사제였으며 훗날 베센의 부제가 되었다. 츠빙글리는 베센에 있는 학교에 다녔으며, 그뒤 바젤(1494)과 베른(1496)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스승 하인리히 뵐플린은 그에게 고전에 대한 열정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들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관심을 가져 수도원에 들어오도록 그를 부추겼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저씨로부터 설득당한 그는 빈(1498)과 바젤(1502)에서 공부했으며, 1504년 바젤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인문주의적 교양을 쌓았으며,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D.에라스무스를 추종하였다. 1506년에서 10년간 글라루스에 있는 교회의 목사로 있는 동안 두 차례나 종군목사로 종군한 후 아인지델른으로 옮겼다. 1519년 취리히의 대성당의 설교자가 되어, 체계적인 성경강해를 하여 시민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 무렵부터 M.루터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취리히시의 종교개혁에 나섰는데, 그는 성경강해를 통해 개혁운동을 개시하였으며, 단식계율(斷食戒律)을 부정하는 저서를 썼다. 또 시 당국이 기획한 토론회에서 <67제안(提案)>를 발표하여, 시 당국을 설득시켜 종교개혁에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또 제2회 토론회에서는 성화상(聖畵像) 폐지에서 십자가 ·제단 ·오르간의 폐지까지 제의하였다. 이 운동의 영향은 취리히는 물론, 그 밖의 도시에까지 번지는 동시에, 가톨릭교를 고수하는 주(州)의 반발도 커서 독일의 루터파(派)와 제휴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1529년의 마르부르크회담에서, 성찬(聖餐)에서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와 몸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이른바 ‘상징론’을 주장함으로써 루터와 의견이 대립된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가톨릭교를 견지하는 원시(原始) 5주(州)와의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취리히군의 종군목사로 참전하여,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에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은 당분간 J.H.불링거에게로, 그 다음에는 J.칼뱅에게로 넘겨졌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