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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에서 영성으로> / 이어령 지음 / 열림원 펴냄 / 304쪽 / 17,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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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을 오후엔 알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역시 꿈에서도 그리지 못한 것들을 겪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크리스천이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가 말입니다."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장관, 국문학자)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읽었다. 그의 회심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거기서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던 그였기에. 이어령 교수 한 사람의 회심이 전 국민들에게 회자될 만큼 그의 위치는 또한 상당한 것인가 보다. 책이 출판되자마자 반응은 뜨거웠다. 한 지성인이 영성의 문턱에 들어선 그 과정이 자못 궁금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1부에서 4부까지 지성에서 영성의 문턱에까지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인이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냐"고 묻는 이들을 위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로 시작해서 그가 세례를 받기까지의 일상을 수상 형식을 빌어 기록한 것. 또한 그를 기독교인이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던 딸 민아의 이야기와 간증도 함께 실렸다.
일본 교토 연구소에서 1년간 홀로 생활하면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영혼에 대해 생각하고 논어를 읽던 눈을 성경으로 돌리고, 지금까지 배우는 기쁨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성서의 창조의 기쁨과 즐거움에 관한 것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되는 시간, 감기를 한 달가량 앓으면서 죽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더 나아간 저자의 심경의 변화를 담고 있다.
쌀 한 자루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해 보기도 하고 무신론자로서 홀로 있는 방에서 기도도 하고, 먹을 것이 족하고 적실 물이 넘쳐나도 그리고 추위를 막아 주는 벽이 있어도 어디선가 그처럼 무거운 쌀자루를 내려놓고 빈 방에 앉아 몰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무신론자들을 생각하고, 문학과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기도 하고 죽음을 인식하면서 점점 변화의 단계를 거쳐 가는 이어령 교수의 모습을 대면한다. 마침내 그는 독백처럼 말한다.
"유다가 될지 모르지만 나도 예수님처럼 열 두 제자의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어차피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정말 튼튼하고 영원한 끈에 끌려다니고 싶습니다." (62쪽)
무엇보다도 일본 도쿄 생활에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영혼에 대해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그가 서서히 지성에서 영성으로 문을 열어 가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예전 생활로 젖어들 무렵, 딸 민아의 전화, 실명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고 딸이 있는 하와이로 가고, 딸이 가는 교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서원 기도를 하기에 이른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 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천한 능력밖에 없사오니 그것이라도 좋으시다면, 당신께서 이루고저 하는 일에 쓰일 수 있도록 바치겠나이다." (122쪽)
기적처럼 딸의 눈은 원래 상태로 돌아왔고, 세례를 받고 점점 더 깊이 지성에서 영성의 세계, 신앙으로 깊이 발 들여 놓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는 말한다. "지성이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영성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이성을 넘어 영성으로, 그 경계에서 이제는 기독교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인사이더로서 지성의 무력과 붕괴를 경험하면서 그 지성을 넘어선 영의 세계, 초월의 세계에 이르는 길에서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혹은 부인하는 자들을 향해, 또한 기성 교회들에게 목소리를 낸다.
칠십이 훨씬 넘어서야 신앙으로 귀의한 저자. 파우스트가 학문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하려 했을 때, 악마가 유혹에 넘어가 영혼을 빼앗길 뻔했지만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그는 지성의 무력과 붕괴를 통해 그것을 넘어선 영성의 세계로 깊이 들어선다. 그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간 것이 지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이 영성으로 인해 예술적 지평은 훨씬 더 넓어졌다"고 고백한다. 또한 이성과 지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는다면 근본적이고 열광적인 종교가 될 우려가 있음도 표명한다.
"20대에는 반기독교적인 글을 많이 썼습니다. 저 역시 소설가로서 창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것들을 내가 만들겠다는 오만한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뛰어 봐야 벼룩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아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창작과 지적 세계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몇 십 배 더 크고 귀한 창조주를 인정함으로써 저의 예술적 지평은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153쪽)
그러나 영성은 결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간과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절망, 즉 자기 깨어짐이 없이는 영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렇습니다.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 파괴라는 극적인 경험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153쪽)
마지막으로 딸 민아의 생생한 간증이 실려 있다. 옥합을 깨뜨리듯 자기를 깨뜨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했고, 시련 속에서도 뜨겁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간증이기에 뜨거운 눈물과 감동으로 읽을 수 있다. 한 지성인의 고백(그리고 딸의 간증)이 생생하고 뜨겁게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프로젝트는 얼마나 신비로운지. 해질 무렵에 포도원에 일하러 간 품꾼처럼 70살이 훨씬 넘어서야 신앙을 갖게 된 저자, 존재론적 외로움 때문에 글을 썼지만 딸의 시련 앞에 서원 기도를 하고 세례를 받고 지성에서 영성의 경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더 깊이 발 들여 놓게 된 저자의 변화를 담담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 대낮에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지나가다가 존재론적 고독과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걸 생각하며 살라는 뜻)를 생각하며 울었던 그가 이미 신의 존재는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숨결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막연히 느끼면서도 멀리 멀리 떨어져 있던 그였다.
20대부터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소유의 결핍보다도 생명의 결핍, 존재의 결여에 대한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존재론적 외로움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그는 이제 숨을 쉴 때마다 그 호흡 속에 계시는 하나님,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를 때에도 그곳에 계신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지성에서 영성의 문턱을 넘었다.
홀로 대면했던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자신이 짊어지고 올라가던 쌀자루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해 보면서 더욱 가까이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며 고백했던 저자의 말처럼, 이 시간에도 방황 속에 있는 영혼들이 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유년 시절부터 무신론자로 돌아서서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하나님께 완전히 포위되어 항복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시인했던 C.S. 루이스처럼, 그가 어떻게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돌아섰는지를 기록했던 것처럼, 이제 먼 길 돌아 지성에서 영성의 문턱에 선 또 한 사람, 이어령 교수를 통해 어떤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지 기대된다.
부디 이 한 권의 책이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사막에서 물을 찾듯 갈한 영혼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질 수 있기를. 한 지성인의 방황과 고뇌, 그리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문지방을 넘었듯이, 이 책이 수많은 방황자의 귀환에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