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죽음과 공포
얼마 전 교계의 큰 어른이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에 큰 족적을 남기시고 소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법정 스님까지 귀에 익숙했던 동시대의 사람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에 한 분뿐인 나의 아버지가 올 1월에 예고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순간, 앞으로도 수많은 지인들이 언젠가는 세상과 작별할 거라는 생각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러자 왠지 모를 숙연함이 마음 한편에서 요동쳐 오더군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죽음이 낯설지 않고 코앞까지 가까이 왔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고 결국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장 잘 알지 못하는 사실도 죽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 하나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입니다. 죽는 순간의 고통이 두려워서 일 수도 있고, 죽음 이후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미지(未知)가 나를 두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하는 소외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은 이 세상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반응하는 현상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는 순간의 고통이 무서워서 육체적 아픔 없이 죽거나, 자면서 편안하게 죽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죽음 이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죽으면 세상과 이간되고 버려진다는 소외감으로 인해 그들의 족적을 남기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문명과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가 되는 이유를 한 가지를 더 보태라고 한다면 신학자 김경재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은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녔던 구체적 몸으로서의 생명이 먼지와 물로 추하게 분해되고 해체된다는 사실, 거역할 수 없는 물리적 안트로피 현상에 내던져진다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감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Elisabeth Kübler-Ross) 박사의 임상 실험에 참가한 한 시한부 여성 환자의 말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녀에 의하면 "나는 벌레를 매우 두려워하는데, 죽은 뒤 땅에 파묻혀 홀로 남겨졌을 때 벌레들이 내 몸을 갉아먹는 그 공포를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죽음에 관해 느끼는 마지막 두려움은 자신의 몸이 무화(無化)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영육이 해체되어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가, 죽지 않고 가는 또 다른 무슨 공간이 있는가'에 관하여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하지만 이런 물음에 대해 그 어떤 사람도 정확한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에 다시 한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비록 최고의 현자라 할지라도 죽음에 관해 명확한 설명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동양 최고의 현자라 할 수 있는 공자도 죽음에 있어서만큼은 말을 아꼈습니다. "이 세상의 삶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 이후의 삶을 알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죽음에 관해 전혀 모른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현세를 살고 있는 인간에게 실존적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이었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인간은 알 수 없는 무언(無言)의 신비, 즉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줄도 모릅니다.
죽음을 넘어서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헬라 철학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하는 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은 '아직' 있지 않고 죽음이 있는 한 내가 '이미' 없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은 송기득이 이해하는 죽음에 관한 의미를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이 의식의 정지라고 한다면 정지된 의식은 의식의 정지를 결코 의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도 죽음을 알 수가 없게 된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은 사실상 남에게만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죽음이란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죽어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실로서의 죽음이 아닌 의미로서의 죽음만 물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에 관한 이해를 정용섭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은 죽어 가는 것(dying)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신은 죽음(death)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실로서의 죽음은 죽어 가는 것(dying)으로, 의미로서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경험으로 구분합니다. 이럴 때 죽음은 전혀 두려워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과 나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적 실체입니다. 보편적 '인간'은 죽음과 마주할 수 있지만 개별적 '나'는 결코 죽음과 만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이 없고 죽으면 이미 내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은 결코 죽음과 조우(遭遇)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너'의 죽음을 보고 듣는 순간 나에게 의미론적인 죽음이 실재하게 됩니다.
죽음, 또 다른 여행
지금까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한 위의 설명은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정반대입니다. 상술한 바로는 인간은 혐오스럽고 무서우며 꺼리고 싶은 죽음과 만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자족할 뿐입니다. 그래서 김경재는 "죽음은 매우 비인간적일 수 있는 현상을 내보이면서 인간성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독재적인 비정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송기득은 폴 틸리히의 표현을 빌려 죽음을 "비존재의 유산"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인간과 죽음을 연결해 주는 접점을 찾을 수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단지 죽음을 배타할 뿐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소극적인(negative)자세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소극적인 자세가 있다면 이와 달리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적극적인 자세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아가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근원적인 이유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성서의 구절을 한번 따라가 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56절 말씀에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사망은 결코 인간을 압도할 수 없습니다. 사망이 인간을 무(無)의 상태로 만들고 단절케 하고 소외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론적 힘을 지닌 게 아닙니다. 단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에게 인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힘 있는 존재로 만든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은 '힘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생명의 결핍'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 그 자체는 두려움을 생산해 내는 '자생적 힘'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실체가 아니라 생명이 결핍된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죽음에게는 인간이 그것에 제압당해 두려움을 파생케 한 '외래적 힘'이 존재할 뿐입니다. 따라서 죽음 그 자체에는 두려움을 만들어 낼 에너지원이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앞에 벌벌 떨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또 다른 관점으로 죽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미 고인이 되신 고(故)김치영 목사님입니다. 그는 죽음을 매우 흥미롭게 해석했습니다. 그는 췌장암으로 죽음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병상에서 그의 아들(조직신학자 김동건 교수)에게 매우 기억될 만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의 여행을 한다. 한 여행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여행은 부활체로서 영생을 산다." 이처럼 그는 죽음을 매우 낭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범인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일반인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이별, 두려움, 근원적 소외를 안겨 주는 '증오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죽음이란 잠시 후면 다시 만나게 될, 미지의 세계를 기대케 하는 '친숙한' 여행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죽음을 여러 번 경험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렇듯 죽음이란 만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아니라, 함께하고 싶은 여행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만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적극성(positive)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죽음을 비존재의 유산으로 보거나 사실과 의미로서의 죽음으로 양분하는 죽음에 관한 수사학은 죽음의 근원성을 완전히 포착하지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죽음은 결코 피해야 하고 두려워할 소극적인 그 무엇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은 죽음을 또 다른 삶을 위한 통로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삶으로의 여행과 영생으로의 여행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죽음은 삶에서 영생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이럴 때 죽음은 두려움을 안겨주는 우리의 '적(敵)'이 아니라 삶과 영생을 이어 주는 우리의 '벗'이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해 또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중에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물론 이 가사는 죽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을 내용으로 쓴 노래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홀로 된다는 것을 죽음과 연관시켜 봅시다. 이 가사가 죽음과의 지평 융합을 거치면 죽음이란 '홀로 되어 슬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해 기쁜 것'으로 승화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요한복음 5장 21절부터 23절까지를 이렇게 주석합니다. "이생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훨씬 더 완전하고 경이로운 삶이 열리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분리된 죽음이 찾아온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자들은 오히려 죽음이 하나님과의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선물이 됩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살면 살수록 죽음에 더 가까워지고 하루의 삶은 하루하루의 죽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한번 뒤집어 본다면 전혀 다른 뜻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생의 선물을 하루속히 주시기를 기대하신다"라는 반어적 표현으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죽음은 인간이 그렇게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배타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기대하고 근원적인 영생의 삶으로 안내하는 축복의 관문으로 환영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을 때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을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게 될 때 죽음은 외래적 힘을 재생하게 되고 인간은 공포의 그늘에 휩싸이게 됩니다. 반면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을 때 죽음은 영생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친근한 벗으로 다가옵니다. 이처럼 죽음은 만나고 싶지 않은 피해야 하는 '적(敵)'도 아니요, 해탈하지 못한 중생의 카르마(業)는 더더욱 아닌 함께 하고픈 즐거운 '벗'입니다.
우리는 먼저 떠나보낸 이들에 대해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이 세상에 한 분뿐이셨던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도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이들도 즐거운 벗과 함께 신 나는 여행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천상의 즐거움을 그들은 '이미' 만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 모두는 부활의 생명체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