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가부장적 목회상담의 상황화: 관계 구조적인 측면에서
탈 가부장적 목회상담의 상황화: 관계 구조적인 측면에서1)
(The Contextualization of Postpartriarchal Pastoral Counseling)
신명숙: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목회상담)
1.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국교인 서구인들과는 달리 종교다원주의속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은 이미 서로 다른 종교들의 영향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 무교, 불교, 도교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늦게 한국문화에 들어온 종교라고 볼때 이미 한국문화에 정착한 다른 종교와의 대화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비그리스도교적인 사회와 문화에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그리스도교의 ‘토착화(Einheimischwerdung)’, ‘상황화(Kontextualisierung)’, ‘문화적응(Inkulturation)' 등으로 표현해 왔다. 그것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기독교 신앙을 문화적인 특성을 고려해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한 이해, 체험, 사건을 각 문화와의 관련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뮐러(K. Mueller)는 ‘문화적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말씀이 구체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수용했으며, 말씀이 이러한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된 것처럼 예수의 복음이 새로운 각 문화 속에서 현현되는 것이다. 즉 각 민족에게 맞는 새로운 형태를 받아들이고, 그 형태는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계시가 되어야 한다.”1) 준더마이어 (T. Sundermeier)는 문화적응을 신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선교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선교과정에서 복음은 교회를 낯선 종교의 세계와 문화 속으로 이끌어, 그러나 복음의 특성을 지닌 채 그 현장 속에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2) 문화적응이란 다른 종교들과 문화와의 만남 속에서 교회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다른 문화와 더불어 새롭게 이해하는 시도이다. 따라서 목회상담의 문화적응화를 위한 상황과의 연관성은 목회상담의 본질을 잃고 문화와 혼합(Synkretismus) 될 때 문제점도 있지만, 그러나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것은 특히 목회상담이란 내담자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목회상담이 처하고 있는 상황은 어떤 것인가? 한국목회상담은 엄밀히 말해서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영향을 받아 왔다. 이론적으로는 주로 서양목회상담 이론,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미국의 이론을 그대로 한국에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상담의 실제적인 현장에서는 오히려 한국문화에 작용하고 있는 많은 정신적 요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볼때 유교적인 요소와 무교적인 요소가 한국그리스도교 전반에 존재하듯이 목회상담 현장에서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잠재하고 있다.
한국인의 무의식, 의식속에 존재하고 있는 유교적이고 무교적인 요소가 한국목회상담에 작용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목회상담이 한국이라는 장(Kontext)에서 지금까지 어떠한 형태로 적응해 왔으며 문제는 없는지, 둘째. 그것이 문제가 있다면 앞으로 그리스도교 복음의 특성을 지닌채 어떤 목회상담의 형태가 한국상황에서 가능한가? 따라서 본 논문의 첫 장은 관계3)를 형성하는 대화의 측면에서 먼저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요소가 목회상담의 한국상황 적응에 있어서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아버지’ 형태의 목회상담을 형성시키는데 큰 역활을 했다는 것과 그러한 목회상담이 현재 한국 목회상담의 현실과 문제점이라는 것을 밝힌다. 다음 장에서는 내담자의 문화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가능성을 무교에서 여성적 차원의 ‘자매’와 ‘어머니’형태의 상담을 찾고, 과연 이 두 가지 형태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지 살펴보면서 목회상담의 상황화를 시도해 본다.4)
II. 몸말
1. 유교문화 상황에서의 목회상담: ‘아버지’ 유형
우리나라 목회상담의 대화는 많은 부분이 목회상담자에 의해 권위적으로 이끌어지는 대화법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충고, 교훈, 또는 제안의 방법을 많이 사용해 왔다. 목회상담자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그러나 그것을 오용하여 내담자와의 대화에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대화의 주체가 되어 버리는 경우(in Form einer Ich-Aussage Gottes)가 있으며, 또한 목회상담자는 자신의 판단을 내담자에게 강압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목회상담자들이 주로 사용하게 되는 언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5):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시오.”(명령, 지시, 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세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훈계, 교훈, 설교)
“내가 만일 당신이라면 남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겠소.”(충고, 암시 해결책의 제공)
이것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남성이며, 유교적인 가부장적인 전통적인 이해에 따라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부성적(Paternalistisches)’인 면이 강하다.6) 우리나라는 성 비율로 볼때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 목회자7)는 지금까지 목회상담자로서 교인들에게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면이 강조되는 아버지의 역활을 해왔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좋은 목자(gute Hirten)로서, 그리고 목자의 임무중 하나인 목회상담 역시 부성적인 권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이렇게 권위적인 ’부성주의(Paternalismus)‘는 유교적인 가부장적 전통문화와 맞물려 목회상담을 단순히 권위적인 말씀권면으로 이르게 했다. 따라서 목회상담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두 사람사이에 이루어지는 쌍방간의 대화가 아니라 목회상담자의 일방적인 충고나 지시적인 충고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8) 이렇게 목회상담자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은 직접적이고 지시적인 관여(direktiven Ansatz)를 통해서 내담자로 하여금 목회상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만들며, 목회상담자와 내담자와의 관계는 부모로서 ‘아버지와 자식’과 같은 관계로 이루어지게 된다.9) 그것은 곧 모든 교인들은 남성인 목회상담자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샤휀벡(J. Scharfenberg)과 페플린(U. Pfaefflin)은 목회상담자와 내담자와의 비상호적인 관계, 또는 내담자가 절대적으로 받는 자가 되어 버리는 관계로서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10) 그것은 이러한 내담자와 목회상담자의 관계에서 내담자는 목회상담자의 말이 종종 교리적이고,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러한 일방적이고 지시적인 목회상담은 한국에 있는 신학대학에 주로 소개되어진 말씀선포를 강조하는 투르나이젠(E. Thurneysen)과 아담스 (J. E. Adams)의 권면 중심의 목회상담 이론과 일치한다. 말씀선포중심 목회상담의 목표가 목회상담자가 내담자의 새로운 삶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담자의 삶에 적용되도록 하는, 즉 ’각 개개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세우는 것’11)이라고 할 때, 이 목회상담의 목표는 한국목회상담 현장에서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말씀선포와 신앙강조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조브(E. R. Kiesow)는 투르나이젠의 이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위험성을 지적한다: “말씀선포 중심 위주의 목회상담을 하는 상담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후견인이며, 재판관이며, 도덕주의자다. 즉 그는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대단한 독단적인 이해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낯선 복음과 만나도록 계속해서 강요하고 시도하는 자다.”12) 타케(H. Tacke) 또한 투르나이젠의 이론이 ‘형식적인 성서주의(ein formaler Biblizismus)'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형식적인 성서주의에서는 성서와의 연관성은 적고 오히려 은혜와 용서에 대한 성서의 주요 문장만이 논의되며, 성서 자체가 말씀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성서 농축물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13) 그러나 목회상담이 목회상담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목회상담자의 권위가 하나님말씀의 권위를 대신하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목회상담 대화에서 의무적인 의미가 담긴 ’당위성(Soll)'과 큰 소리로 외치는 선포, 교육적인 가르침, 그 어떠한 것도 필요가 없다.14)
그렇다면 대화의 방해가 될 수 있는 권위적인 목회상담자의 충고나 교훈과 같은 지시적인 방법과는 다른 형태의 목회상담이 한국상황에서 가능할까? 그렇다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2. 무교문화 상황에서 목회상담의 가능성
2. 1. 무당의 상담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지시적이고 종속적인 목회상담을 극복하고 한국목회상담의 상황화를 위하여 우리는 한국의 오랜 역사속에 존재해 온 무교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 본다. 무교의 굿은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좋은 상담의 자리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무당이 조상의 넋두리를 통해 야단도 치며, 잘못된 것을 지적해 줌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문제 해결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치료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15) 그렇다면
어떻게 무당이 상처받은 사람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인가?
무당은 상담을 할 수 있기까지 스스로 가정적,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과 ‘한’을 겪어 왔으며, 무당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고통을 극복한 여성이었다.16) 신이 내려 내림굿을 하는 무당 후보자에게 선배무당은 과거에는 자신의 고통이었지만 이제 남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신의 제자가 고통에 살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고 한 많고 원 많아..... 네가 만신(무당)이 되면 그런 괴로움이 없는 줄 아느냐? 과거에는 네 고통이 너 자신의 고통이었지만 만신이 되면 모든 사람의 고통이 네 고통으로 되느니라 ... 부자, 가난한 사람, 미운놈, 고운 놈 모두 다 똑같이 진실하게 대하라. 어찌 부자만 위해서 제가 만신이 되겠느냐?”17)
새로 태어난 무당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감내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해결해 주며,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을 의무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계급적이고 가부장적 유교문화에 의해 억눌려 살았던 한국의 서민들과 여성에게 무당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좌절당한 감정과 삶의 탄식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맺힌 감정을 풀어 주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렇게 무당은 마음이 상하고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의 동반자’로 그리고 갈등을 풀어 주는 ‘해결사’로 존재한다.:
“이 집이 그렇게 시집살이가 세다지... 도무지 손톱에 물 마를 짬이 없구 앉아 있을 틈이 없어서 머리도 못 빗구... 어디 참빗 없나 이가 버글버글 끓을지도 몰라... 어디 옷이라도 잘 입어야지(소당애기씨에게 바친 붉은 헝겊을 허리에 둘러 준다). 층층시하가 되어 치마하나 갈아 입지 못하구 어디 손좀 내놔 봐. 저런 생선가시가 들었어 쪽집게로 빼야지(입으로 빨아준다) 어디 분도 가져오고 연지도 가져와 신식으로 화운데이숀인가(화장을 시키고 맆스틱으로 연지 곤지로 찍어 준다. 사람들은 이쁘다고 떠들어 댄다. 속눈썹을 뽑아 주는 흉내도 낸다) 시집살이 얘기좀 해 봐(화장은 도사공이 심술이 많아서 자기를 부려먹는다고 고해 바친다) 저런, 숭늉이 차다고 해서 속이 상해 팔팔 끓여 갔군 도사공이 그걸 모르고 꿀꺽 마시고는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려 왜 우시느냐고 했더니 뜨겁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고향생각이 나서 운다고 하드라구. 그러나 저러나 일중선 도사공님을 불러야지. 자 여기 화장을 곱게 화장시켜 놓았으니 화장을 이쁘게 보구 곱게 보아 서 늘어가구 벌어가구 화목하구 편안하구 만백성에 장원하라구 이 신사드리니 한맘으로 되어 잘 노시구서 도와주어야겠읍네”18)
위에서 본대로 무당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주는 ‘동반자’로서 인생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해답을 주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죽은 조상의 넋이 무당의 입을 통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병의 원인을 말해 줌으로써 인생문제의 핵심을 깨닫도록 도와주며 결국에는 갈등과 문제의 핵심을 풀어 주는 ‘해결사’ 역활을 한다:
“부모 형제 화목하지 못한 것이 병의 원인이라.....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자식은 부모를 섬기고 그래야 가정이 화평하고 병이 없느니라. 이제 네가 병을 나을려 한다면 부모가 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너는 부모의 말을 잘 들어라.”19)
굿은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자연스럽게 가족이 참여하여 가족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가족상담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20) 특히 무당은 문제를 갖고 있는 내담자의 가족들의 생활과 심리상태를 잘 이해하며 공감하고 있는 상태에서 조상의 넋두리를 통해 평소 내담자, 또는 가족들이 말하지 못하고 나타내지 못했던 억압된 감정들을 대신 표출해 준다. 그리고 내담자와 가족들은 거기에 응수하기도 하고 용서를 빌기도 하며, 자신의 처지와 공감이 되어 서러움 또는 죄책감에 통곡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 역사 속에서 무교는 여성의 종교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여성들이 무당을 찾았다.21)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관습으로 인한 여성들의 한풀이는 같은 여성인 무당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스스로 고통을 체험한 무당과 고통속에 있는 여성내담자는 같은 여성으로서 겪는 비슷한 경험을 통해 서로 더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여성으로서 갖는 연대감(Solidaritaet)이다. 오로지 남성에게 순종과 봉사와 희생만을 요구하며 여성이라는 존재가치가 없는 억눌린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속에서 여성들은 무당의 굿을 통해 가슴속에 억눌린 ‘한’과 고통을 같은 여성인 무당에게 풀어 놓으므로써 감정해소를 하며,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함으로써 조상의 넋두리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게 되고, 무당은 야단도 치고 훈계도 하지만 평소 가정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며, 어머니, 또는 언니와 같이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내가 원이 많아, 한이 많아, 나는 산전수전 다 겪었구, 가진 곡경 다 겪었구, 아버지 만나 고생두 많이 하구 풍상두 많이 했구, 만고풍상 장장수 다 겪은 나다 - 시름이 많아, 원이 많아 - 가지가지루 나는 불쌍해 - 그래두 긴긴세원을 살려면 좋은 것두 보구 언짢은 것두 보는게 이세상 사는 거야 - 언짢은 것은 영광으루 알구 경사루 알면 되는 거 -, 저만 알구 나만 알문 됐지 - 아이구 분해, 아이구 분해 ... 우리 상남 자손아, 술 많이 자시지 말구 늦게 들어오지 마라 ... 남의 여자 곁눈질두 하지마라 - 길조심 차조심허구 ... 이젠 너두 늙었으니 건강이 젤야, 보약두 좀 먹구, 끼니 때 거르지말구”22)
무교에 나타난 이러한 상담적인 요소가 과연 한국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목회상담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목회상담에서 수직적 관계형성을 이루는 가부장적인 요소는 남성에게만 존재하고 동반자적인 관계와 모성적 공감은 여성에게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논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남성에게도 동반자적이고 모성적인 공감을 형성할 수 있고 여성 또한 가부장적인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충고나 훈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당의 상담에서도 충고나 교훈과 같이 통제하는 권위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속에 있는 한 여성이 무당이 되면서 비로서 신을 모신다는 이유로 보통여자로서 할 수 없는 충고나 교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여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유교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남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수직적 지도력이 무당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권위적인 수직적 측면이 아니라 무당의 상담 밑바탕에 차지하고 있는 수평적 차원의 자매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의 연대감, 그리고 모성적 공감과 위로이다. 이것은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수직적 관계형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치유하는 힘‘23)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목회상담의 상황화의 가능성으로서 무당의 상담에서 다음 두 가지 특성을 발견한다: 첫째, ‘고통의 동반자’로서 함께 공감하는 자매적인 형태의 동반자적 연대감이며, 둘째, 어머니 모형으로서 모성적 구조이다. 탈 가부장적 목회상담의 모형으로서 이 두 가지 특성이 과연 신학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 2. 탈 가부장적 목회상담의 모형
2. 2. 1. ‘자매’ 관계구조: 동반자적 연대감
목회상담은 결코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24)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인 방법론에서 볼때 이러한 권위적인 방법은 로저스(C. Rogers)에 의해 발전된 비지시적 대화법 - 내담자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이 상담자에 의해 반영되고, 내담자가 스스로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과는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담(K.-W.Dahm)은 이러한 비지시적 대화법을 ‘거울방법(Spiegelmethode)'이라고 표현하면서 상호적인 대화가 감정적인 연대감을 갖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25) 대화의 원동력으로서 비지시적인 방법은 목회상담자가 교훈, 또는 충고를 더 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대화의 진행방향이 내담자에 의해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타케는 이러한 대화구조를 신학적으로 발전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는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도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신앙의 도움으로 연결되어 있다.”26) 따라서 목회상담의 대화의 방법은 복음에 근거한다: “복음의 힘이 직접 인간애적인 대화로 이끌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상응하는 믿음은 대화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27) 그러나 목회상담이 복음에 상응하면서, 그러나 지시적이거나 교훈적이 될 수 있는 복음의 율법화가 되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하면 내담자가 권위적인 가부장적 목회상담자가 아닌 복음과 만날 수 있을까?
타케에 의하면 복음과의 만남은 문자적이고 교리적인 선포보다 ‘성서이야기를 오늘의 상황으로 가져옴(Einbringen der biblischen Ueberlieferung)'으로써 가능하다고 본다.28) 목회상담자가 내담자의 위기와 질문을 성서 이야기에서 찾아봄으로써 성서 이야기와 비슷한 현재상황이 자신의 사고에 자극을 줄 수 있으며,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목회상담에서 성서와의 만남을 성서의 사건과의 실제적인 대화로 이해하는 타케의 이론은 큰 의미를 제시한다. 그러한 만남은 권위적인 방법으로 일방적인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서 이야기와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남성중심의 권위적이고 지시적인 가부장적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수평적 관계인 `형제자매적인 관계’이며, 해야만 하는 `의무(Soll)‘로서 선포하는 교리적인 강요가 없는 동반자적인 대화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형제자매적이고 동반자적인 목회상담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마음속 깊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며, 내담자를 향한 관심이다. 그러한 목회상담은 오히려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연대감을 형성케 하며, 권위적인 그 어떠한 것도 사라지게 한다.29)
이렇게 이상적인 목회상담의 관계가 수직적이고 계급적인 강한 불균형으로 부터 수평적이고 동반자적 관계의 균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목회상담자가 남성중심의 형제적 동반자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과의 자매적인 관계의 의미가 또한 반영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한국상황에서 목회상담의 자매적인 관계형성을 위한 표본으로서 무당의 상담을 지칭했다. 무교가 여성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문제를 안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무당을 찾아온 것처럼 한국 그리스도교 역시 선교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서민들이나 여성들의 고통과 함께 참여해 왔다. 그 당시 복음화, 교육, 보건이라는 선교목표에 따라 여성들은 비로소 학교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여성해방을 위해 좋은 역활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선교사들을 도운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과부들과 같은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이다.30)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많은 여성들에게 접근해 갈 수 있었다. 그것은 많은 여성들이 무교에서와 같이 그리스도교에서도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31) 복음의 자유에 대한 선포는 ‘한’이 맺힌 사람들과 한국여성의 상황에 적중했다. 따라서 한국교회 교인들중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남성보다 큰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여성을 위한 무교와 그리스도교의 의미를 고찰해 볼때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무당의 역활이 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치유하고 위로한 것처럼 교회에서 목회자들의 상담 대상이 역시 그들이었다. 그러나 남성 목회상담자의 행동에 직접, 간접으로 큰 영향을 준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와 사고방법으로 인해 종종 도움을 청하러 온 여성들에게 실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와도 같은 목회자 뒤에는 오히려 목사사모들과 여전도사들, 그리고 많은 여성교인들이 실제적으로 목회상담자로서의 역활을 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한국그리스도교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경험으로 괴로와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목회상담자 자신도 비슷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서슴없이, 그리고 겉치레없이 내담자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함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백인이 검은 피부색깔로 인해 고통받는 흑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스스로 흑인이 되어야 한다.”32)는 말이 있다. 그것은 곧 고통을 경험한 자만이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문제는 같은 고통을 체험한 여성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33)
이렇게 볼때 한국의 많은 목사사모들과 여전도사들은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 목회상담자보다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과 쉽게 공감할 수 있고, 남성 목회상담자와는 또 다른 경험을 나눌 수 있으며, 또한 남성과는 다른 자극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할케스(C. J. M. Halkes)는 상담에서 특히 여성들의 문제를 특별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성들은 서로 위로하고 보호함으로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서로 용기를 주면서 포옹을 하며. 비슷한 운명, 비슷한 고통과 갈등에 처한 자로서 다시 인식되어질 수 있다.”34)
이러한 자매적인 연대감을 한국여성들은 교회역사 속에서 이미 형성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 그것은 가부장적인 한국목회상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현장에서의 많은 여성들의 활동에 대하여 공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들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특별한 가치를 두지 않았지만 오히려 실제적으로 목회상담자의 역활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성목회상담자들과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여성이 함께 일하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같은 여성으로서 여성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목회상담의 ‘자매성(Schwesterlichkeit)'을 활성화 시키며, 또한 여성들을 함께 일하는 동반자적 동려로서 목회신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며, 여성차원에서 목회상담을 정립해야 한다.
2. 2. 2. ‘어머니’ 관계구조: 모성적 상담
교인들에게 순종을 우선적으로 요구하며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속에서 교인을 바라보는 한국목회상담자의 권위적인 자세는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분명히 유교적인 가부장적 구조의 연장이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목회상담의 모성적인 유형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이 무당을 찾아가 아픔을 하소연 하면서 위로를 얻는 무교와 비유할 수 있다. 무당의 모성적인 모습은 무교의 상담에서 큰 역활을 한다.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무당에게서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어머니의 모습을 더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함께 울어 주고 아픔을 깊이 함께 느끼며 품에 안아 위로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상징인 ‘남성성’이 권위, 훈육과 엄격 등으로 표현되어진다면 어머니의 상징인 ‘모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여성에게 ‘모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 “하나는 여성의 가슴인데 그것은 양육의 기능과 생기를 주는 비유적인 의미를 상징하며, 또 다른 하나는 싸여져서 보호하는 동굴과 같고 사랑이 충만한 온기로 표현되어 질 수 있는 자궁(Schoss)이다. 이 둘은 모두 의존, 일체, 융화의 관계를 상징하며, ‘여성성’을 의미한다.”35)
여성의 특성인 이러한 ‘모성’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찾을 수 없을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남성의 모습으로 절대적으로 순종을 요구하는 왕으로, 기사, 또는 전쟁의 영웅, 재정가로 묘사되어 있다.36)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은 강함, 통치, 전능으로 남성적인 형상에 근거한다. 이러한 남성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 전통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고통에 처한 우리 인간을 위로하시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찾아 볼 수 있다. 구약성서 여러 곳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종종 어머니적인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때로는 여성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내와 잉태, 또한 양육하고 보호하는 생명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나타난다.37) 몰트만(J. Moltmann)은 일반적으로 ‘아버지’로 묘사되었던 하나님과 성령을 ‘어머니’로 표현한다.38) 그는 인간이 신앙인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자식을 낳는 ‘하나님성(Gottheit)'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잉태하고 양육하며, 보호하고 위로하며, 또한 동정하며 사랑의 공감으로 나타나는 ’삶의 원천(Quelle des Lebens)'으로 경험되어 진다. 즉 신앙인이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면 성령은 하나님 자녀의 어머니이며, 성령이 위로자라면 그는 어머니처럼 위로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성’이 성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목회상담에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가?
첫째, 어머니의 모성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성서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자비(Barmherzigkeit)’의 히브리어 어원 '레헴(raechem)'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레헴은 여성의 ’자궁(Mutterleib)‘을 뜻하는 말로서 어린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도록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을 의미한다.39) 어머니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 열 달동안 태안에 품고 아이가 그 안에서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참고, 보살피며 아픔을 감수하면서 마침내 한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것은 새로 태어 날 생명에 대하여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모성적 사랑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신체기관인 레헴은 은유적으로 성서 여러 곳에 하나님의 동정심과 자비, 그리고 애정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로 쓰인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반사적으로 태 안에 있는 생명을 보호하고통을 참아가며 생명을 탄생시키는 모성적 사랑에 근거한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 생명의 처음부터 모태는 있었으며, 그것은 모든 삶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너를 지으신 분 네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를 도와주마’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사44:2)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 사랑은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잘못되었을 때 가슴 졸이며 마음 아파하는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은 예수께서 이방의 지역에 가셨을 때 자식의 병을 위해 애절하게 매달리는 희랍여인 이야기(막 7:24-30)에 잘 나타난다. 그것은 아이의 병만 낫는다면 어떠한 굴욕도 참을 수 있다는 간절함으로 마침내 아이의 생명을 다시 구하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다. 어머니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성장하면서 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온갖 힘을 쏟아 생명을 다시 살리는 것처럼 상담자의 간절한 돌봄과 보살핌으로 상처입은 영혼을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목회상담이다.
둘째, 어머니의 모성은 자기 살과 젖을 나눠주고 아픔을 함께 하는 ‘나눔’이다.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이 어머니의 모성적 나눔에 비유해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사49:14-15) 젖먹이 어머니가 아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의 젖이 불을 때마다 자신의 젖을 먹지 못하고 우는 아이를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모성이다.40) 어머니의 살에서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아이이기에 아이의 배고픔과 아픔은 곧 어머니의 배고픔과 아픔이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어 어머니 자신은 굶을지언정 어렵게 구한 양식을 자식에게 주는 것이 모성이다. 구약성서에도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아브라함에게서 쫒겨 나와 광야에서 헤매면서 물이 다 떨어지자 아이를 덤불 아래 뉘어 놓고 아이가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면서 통곡하는 장면이 있다(창 21:15-18). 자식의 죽음은 곧 어머니 자신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식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느끼며 아파하는 어머니의 애절함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가 자식의 아픔을 괴로와 하며 함께 그 고통을 나누듯이 목회상담은 내담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아파하며 공감하면서 나누는 것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입은 자의 아픔이 목회상담자에게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와서 진정으로 함께 공감하며 나누려고 할 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뻗치는 것이다
이러한 애절한 마음은 자식이 늙어 백발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처럼 걱정하고 아끼며, 고통에 처한 자식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하나님도 이러한 어머니의 본성에 비유해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사46:3-5). 목회상담도 이렇게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여 늙어서도 언제 어디서나 보살피려는 어머니의 본능처럼 마음의 상처받은 자가 완전하게 치유될 때까지 계속해서 지켜봐 주는 것이다. .
세째, 모성은 모든 것을 인내하고 가슴에 품어주는 무한대에 가까운 어머니의 ‘수용성’이다. 어머니는 자식의 어떠한 잘못도 이해하고 품어주는 넓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식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은한 생각에 마음 아파하고 자식을 다시 받아들여 위로하는 어머니의 품이다. 어머니가 그 어떠한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적 자세는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는 온아함에 근거한다. 그 어떤 권위나 훈계, 또는 강요가 존재하지 않으며, 힘들때나 슬플때나, 그리고 잘못을 저지렀을 때라도 늘 안길 수 있고 안기고 나면 다시 새 힘을 얻게 되는 곳이 어머니의 온아한 품이다. 모든 것을 다 품어 주는 어머니의 가슴은 그렇기 때문에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에 라헬의 자식에 대한 아픔과 사랑과 같이 하나님이 잘못된 자식에 대하여 책망하면서도 온아한 모성적 동정으로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주의 말이다.“(렘 31:20) “41) 이사야 또한 종의 노래 속에서 백성을 포로로부터 귀환하도록 하여 인도하면서 고통받은 그의 백성을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아파하며, 위로하시고 동정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또한 고난을 받은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사49:13).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사66:13). 하나님의 위로는 온유한 어머니의 품과도 같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데살로니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는 것과 같은 온유함으로 그들을 받아들이고 처신했다고 말하고 있다(데전 2:7).
자식의 잘못을 보며 “너가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라고 자식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식의 모습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온아한 수용적 사랑이 바로 목회상담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의 이러한 행동과 신앙 때문에 그런 것이오”라고 책망하기에 앞서 먼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온아한 어머니 같은 넓은 품이 준비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다시 새 힘을 얻듯이 목회상담 또한 이러한 모성적 수용을 통해 자기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며, 치유가 이루어 지도록 돕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것을 주면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어머니만이 지니고 있는 여성적 특성과 우리 인간이 어려움에 처할때 어머니가 자식의 고통을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며 애통해 하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함께 고통에 참여하며, 아파하며, 공감하는 나눔의 목회상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책망하고 훈계하는 아버지보다는 힘들때 다가가서 안길 수 있고 보호하고, 감싸주고 위로하시는 것을 잊지 않는 온아하고 자비로운 어머니의 수용적 목회상담. 이러한 모성적 상담이 곧 목회상담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III. 맺는말
위에서 우리는 유교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수직적 목회상담을 극복할 수 있는 탈 가부장적 목회상담의 가능성을 무교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목회상담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체험적 연대감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수평차원의 자매구조와 생명을 탄생시키고 자기 것을 주고 아픔을 나누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수용해 주는 모성적 구조로서 신학적으로 재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 제시함으로써 탈 권위적이고 탈 가부장적인 목회상담의 근거를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해 보기로 한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바(Abba)'42)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의 권위적인 면이 아닌 어린아이 같은 신뢰의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다. 몰트만은 이러한 권위적인 부성적 의미가 아닌 신뢰하며, 친근감 있고 애정깊은 어린아이의 단어인 ’아바‘의 의미는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어머니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아바는 모성적인 방법으로 버림받은 자를 품에 안아주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요계 21:4)”43).
몰트만의 이러한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아바'로 묘사되는 하나님 체험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예수자신의 체험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성은 이 세상의 아버지와 같은 가부장적인 권위와 비유해서는 안된다.
또한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언급할 때나 그의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칠 때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일치되는 공동체는 가부장적이 아닌 형제자매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가족적인 관계로 부터 벗어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 12:50) 로휜크(G. Lohfink)에 의하면 예수의 '아바'관계로 들어가는 공동체안에서는 형제자매적이며 모성적인 관계를 의미하지만 분명한 것은 권위적인 가부장적인 관계는 아니다: “새로운 가족형태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가부장적인 권위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단지 어머니성(Muetterlichkeit)과 형제성(Bruederlichkeit), 그리고 자녀성(Kindschaft)만이 존재할 뿐이다.”44)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아버지이시기에 이 세상에서는 권위적인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23:9). 하나님안에서의 새로운 공동체는 인간의 어떠한 형태의 가부장적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수직적인 관계형성에서 이루어지는 목회상담은 동반자적인 관계 속에서 모성적인 공감과 위로로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를 돌아 보시고, 예수의 행위를 통해 계속해서 모성적 사랑을 나타내시는 예수의 ‘아바’ 개념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의 의미와 상반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아바' 개념과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공동체의 의미는 인간인 목회상담자의 권위적인 기능에 도전하는 탈 가부장적 목회상담을 제시해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목회기능과 더불어 목회상담에서의 권위는 오로지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권위를 가지고 목회상담을 행하는 사람의 역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목회상담에서는 ‘아버지-자식(Vater-Kind)'의 관계가 아닌 모성적인 ’어머니-자식(Mutter-Kind)'관계와 동반자적인 ‘형제자매(Geschwister)'관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한국교회 문화는 여성에게 무조건으로 희생과 봉사, 그리고 순종만을 요구하며, 여성들 스스로도 남성목회자에게 종속되는 것에 익숙해 있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실과 남성 목회상담자의 권위적인 상담현장에서 탈 가부장적인 목회상담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교회 내에서 목회상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들은 스스로 변화되어져야 한다. 즉 여성들 스스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적응하려는 것과 남성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려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45) 그것은 목회상담자로서 여성만이 지니고 있는 본성 - 동반자적 체험의 연대성과 모성 -을 되찾아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숨겨지고 억압된 총체적인 삶과 힘의 잠재력을 자유롭게 하며, 그것을 마음껏 펼치도록 하는 것이다.46) 그것은 여성만이 지니고 있는 본성으로 다른 사람의 슬픔과 기쁨, 고독한 어두움과 빛, 희망과 절망을 나눌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여성들 각자 다른 여성의 보호자가 될 정도로 곁에 있어주고 용기를 주며, 돌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들에게 자신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그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남성 목회상담자는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남성 역할 - 권위적이어야 하며 근엄해야 하는 - 에 대한 기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남성 내면에 잠재하고 있고, 남성에게도 가능한 모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어머니와 같은 위로와 수용성을 목회상담에 적극적으로 활성화시키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남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오히려 목회상담이 훈계와 충고에 머물게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째, 목사사모, 여전도사, 또는 여 집사의 목회상담 활동이 남성 목회상담자의 `그림자‘의 역할이 아닌 남성 목회상담자와의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동등한 가치가 부여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목회자들의 의식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점차적으로 그들의 여성 동력자를 더 이상 단순히 목회자를 돕는 자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권한을 가진 자로서 받아 들여져야 한다. 여성과 남성과의 진정한 공동체적, 그리고 동력자적 형태는 탈 권위주의적 목회상담으로 가능케 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의 목회상담 활동을 적극적이고 공적으로 장려해야 할 것이며, 그와 더불어 여성들 스스로 그것을 위해 충분히 교육되어져야 한다.
네째, 이러한 여성의 본성 - 자매적 연대감과 모성- 을 활용한 목회상담을 현대사회에서 누가, 그리고 어디에서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지 인식해야 하며, 구체적인 상담의 장 - 청소년상담, 부부상담, 성폭력상담 등 -에서 적절하게 적용되어질 수 있도록 적극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고통을 체험하고 극복하여 치유 받은 자가 직접 상담자가 되어 비슷한 문제로 고통받는 자를 도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1) 본 논문은 신학사상(1999년 여름호)에 발표되었던 것임: 신명숙, "탈가부장적 목회상담의 상황화", 「신학사상」, 한국신학연구소, 1999/여름, 199-225.
2) K. Mueller, “Inkarnation”, in: K. Mueller/T. Sundermeier(Hg), Lexikon
missionstheologischer Grundbegriff, Berlin 1987, 178.
3) Th. Sundermeier, “Inkulturation und Synkretismus, Probleme einer Verhaeltnisbestimmung”, in: EvTh 52, 1992, 201.
4) 목회상담의 방법론은 지난 반세기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성서적이고 교회전통에 근거한 이론들, 또는 심리학이나 심리치료의 이론과 밀접한 관계속에서 다양한 방법론들이 등장했다. 이 이론들이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나왔지만 모든 목회상담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공통적이다. 스톨벡(D. Stollberg)에 의하면 목회상담은 내담자와 상담자와의 관계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심리학적으로는 관계를 형성해 주고 보존해 주며, 관계로 끝나는 대화이다: D. Stollberg, Wahrnehmen und Annehmen, Guetersloch 1978, 44.
5) 한국적 목회신학을 위해 무교에 나타난 모성적 요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서 이기춘은 그의 저서 「한국적 목회신학의 탐구」에서 부성적이고 모성적인 전통과 한국목회의 형태를 구별했다. 그는 유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전도적이고 집단적인 설교중심의 아버지 유형의 목회가 형성 되었으며, 무교를 통해 개인적인 어머니 유형의 목회가 이루어 졌다고 말한다. 특히 이기춘은 아버지 유형은 설교와 예배, 어머니 유형은 목양과 상담(pastoral care and counseling)으로 분류하면서 부성과 모성의 통합적 목회신학을 시도했다: 이기춘, 「한국적 목회신학의 탐구」 (서울: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1989).
6) 오성춘은 비효과적인 부모의 권위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상담자의 잘못된 대결 방법을 예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오성춘, 「목회상담학」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285 이하.
7) 유교가 그리스도교에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하여 아래 논문들을 참고하라: 임걸, "교회갱신을 위한 여성의 역할", 「기독교사상」 1998년 2월호, 29-39, 32 이하; 강남순, 「페미니즘과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97-117.
8) 노치준의 여성성직과 교회내 여성지위에 대한 태도조사에 의하면 여성목사안수 허용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찬성:50.3%, 반대: 25.1%)을 보인 반면, 여성목사를 담임목사로 초빙하는 실제적인 질문에는 아직까지 반대하는 쪽이 더 많다는 사실(특히 교회의 중요 직분자들은 반대가 64.8%로 일반신도들의 반대 44.3%보다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로 미루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남성 담임목사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치준, 「한국 개신교사회학」 한국교회의 위기와 전망 (서울: 한울 아카데미 1998), 163-167; 강남순, 「페미니즘과 기독교」, 149. 여성안수가 허용된 교회에서도 안수받은 여성들은 목회자의 신분으로서 보다는 남성들 모임에 끼인 특별한 여성으로서 여성평신도와 함께 성직자와 남성평신도 다음에 위치한다고 강남순은 여성목회자의 소외와 배제에 대해 비판한다.
9) 이러한 대화방법을 로저스(C. Rogers)는 목회상담자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를 임의로 결정하고 내담자가 이 목표에 따라 잘 움직이도록 그의 인생에 중개적으로 관여하는 ‘지시적(direktiv)'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Carl R. Rogers, Die nicht-direktive Beratung, Muenchen 1972, 31.
10) C. J. M. Halkes, Suchen, was verloren ging. Beitraege zur feministischen Theologie, Guetersloh 1985, 53.
11) J. Scharfenberg, Seelsorge als Gespraech. Zur Theorie und Praxis der seelsorgerlichen Gespraechfuehrung, 5. Aufl., Goettingen 1972, 17; U. Pfaefflin, Frau und Mann, Ein symbolkritischer Vergleich anthropologischer Konzepte in Seelsorge und Beratung, Guetersloh 1992, 74.
12) E. Thurneysen, Die Lehre von der Seelsorge, Zuerich 1988/ 6. Aufl., 11-14.
13) E. R. Kiesow, Das Proprium der Seelsorge, in: ThLZ 103, 1978, 241-250, 247.
14) H. Tacke, Mit den Mueden zur rechten Zeit zu reden, Neukirchen-Vluyn 1989, 66.
15) A.a.O., 50-51.
16) 김광일, 「한국전통문화의 정신분석」 (서울: 시인사 1984).
17) 우리나라 무교인의 남녀 성비율로 볼 때 여무가 거의 지배적이고 남무는 극소수에 불가하다. 따라서 무당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여무를 의미하며, 남무의 경우 박수라고 칭한다. 특히 신이 내려서 무당이 되는 강신무의 경우 여성이 지배적인 수를 차지한다: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서울: 집문당/3판, 1985), 196.
18) A.a.O., 245-246.
19) 이것은 황해도 배연신굿에 나오는 무당의 재담으로서 배 안에서 밥짓고 빨래하는 여자의 역활을 하는 화장에게 도사공의 시집살이에 얼마나 고생이 심하냐고 위로하면서 화장의 고통을 표출하게 하고 도사공의 너그러운 마음을 부탁함으로서 화해를 구하는 것이다: 황루시, “황해도의 배연신굿”, 「한국의 굿과 무당」 (서울: 문음사 1988), 177-198, 188 이하.
20) A..a.O., 162.
21) 굿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치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김영애, “가족치료의 토착화와 한국여성의 한”, 「한국가족치료학회지」 Vol. 1. 1993, 13-30.
22) 무교는 한국에 현존하고 있는 종교중에서 유일하게 시종일관 여성이 그 중심에 차지하고 있으며, 여자로서 자신 스스로 고통의 삶을 살면서 극복한 무당은 때로는 어머니로서, 또는 언니의 입장에서 불이익에 처한 많은 여성들을 도와 그들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위치에 있어 왔다: C. K. Chung. Schamanin im Bauch - Christen im Kopf. Frauen Asiens im Aufbruch, Stuttgart 1992, 130.
23) 무당은 죽은 자의 생전의 한을 이야기하면서 가족 개인 개인을 위로한다: 1977년 6월 11일 梨大 지노기 새남굿 中, 김인회, 「한국인의 가치관」 (서울: 문음사 1983/3판), 233에서 재인용.
24) 강남순, 「페미니즘과 기독교」, 144: 강남순은 지도력을 `지배(dominating)의 지도력‘과
`나눔(sharing)의 지도력’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나눔의 지도력은 지배의 지도력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신이 가진 능력을 함께 나누며 잠재성과 창조성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나눔의 지도자 가 지닌 힘은 통제하는 힘이 아니라 `치유하는 힘‘이다.
25) M. Josuttis, Praxis des Evangeliums zwischen Politik und Religion. Grundprobleme der Praktischen Theologie, 2. Aufl., Muenchen 1980, 110.
26) K.-W. Dahm, Beruf: Pfarrer. Empirische Aspekte, Muenchen 1971, 272-275.
27) H. Tacke, Glaubenshilfe als Lebenshilfe, Probleme und Chancen heutiger Seelsorge, 3. Aufl., Neukirchen-Vluyn, 1989, 170.
28) A.a.O., 182.
29) A.a.O., 56, 58.
30) 신명숙, “현대독일 목회상담과 한국 목회상담의 전망”, 「한국교회와 신학 실천」 박근원 교수 정년퇴임 기념문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382이하; H. Tacke, Glaubenshilfe als Lebenshilfe, a.a.O., 169-181. 타케는 이러한 동반자적 대화방법과 다른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진심으로 동참하며,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형제적인 목회상담(Mutua fratrum consolatio)을 강조한다: “나와 너가 서로 동반자적인 관계에 있다.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D. Stollberg, Wahrnehmen und Annehmen, a.a.O., 100.
31) H. E. Kim, Auf dem Weg zu einer feministischen Theologie im koreanischen Kontext, in: Ch. Schaumberger, M. Maassen (Hg), Handbuch Feministische Theologie, Muenster 1988, 61-71, 63.
32) 기독교 선교초기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입교동기에 관해서는 李愚貞, 「한국기독교 女性百年의 발자취」 (서울: 民衆社 1985), 50 이하 참조; H. K. Chung, Schamanin im Bauch - Christin im Kopf, a.a.O., 129. 정현경은 예수를 가장 고통당하는 사람으로 동일시 했기 때문에 여성들과 억눌린자를 위한 상징으로 표현한다.
33) C. J. Halkes, Suchen, was verloren ging, a.a.O., 145.
34) A.a.O., 145.
35) C. J. M. Halkes, Suchen, was verloren ging, a.a.O., 136.
36) C. W. Bynum, Jesus as Mother, Berkeley 1982, 112에서 재인용: U. Wiethaus, Gott als Mutter in mittelalterlicher Spiritualitaet, Methodologische Ueberlegungen zu C. W. Bynums Buch "Jesus as Mother", in: M. Th. Wacker(Hg), Der Gott der maenner und die Frauen, Duesseldorf 1987, 95.
37) B. Dorst, Ueber das Leiden von Frauen am patriarchalen Gott, der Kirche und den
Kirchenmaennern, in: WzM 44, 1992, 437-449, 439; E. Moltmann-Wendel, Gott, unsere Mutter, in: K. J. Kuschel (Hg.), Lust an der Erkenntnis: Die Theologie des 20. Jahrhunderts, Muenchen 1986, 119-128, 119.
38) C. J. Halkes, Suchen, was verloren ging. a.a.O., 122; 안상님, 「여성신학 이야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46-53.
39) J. Moltmann, Der Geist des Lebens: 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 Muenchen 1991, 171, 174.
40) W. Mueller, Begegnung, die vom Herzen kommt. Die vergessenen Barmherzigkeit in der Seelsorge und Therapie, Mainz 1993, 51; 자궁의 뜻을 가진 '레헴‘이 복수형으로 쓰일때는 동정, 자비, 사랑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동사로는 ’자비를 보이다‘, 형용사로는 ’자비로운‘ 뜻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레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T. Kronholm," raehaem", in: Theologisches Woerterbuch zum Alten Testament, Bd. VII, Stuttgart/Berlin/Koeln 1993, 477-482.
41) 안상님, 「여성신학 이야기」, 46.
42) 필리스 트리블, “은유의 전이 - ‘모태’에서 ‘자비’로”, 이우정(편) 「여성들을 위한 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 50-88, 68-73: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궁이 떨린다”는 것을 의역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여성이 자궁이 떨리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마음이 떨리는 하나님의 애절함을 표현한 것이다. “측은한 마음”은 히브리어로 어머니 같은 연민으로 나타나는데 자식을 야단치면서도 마음 아파하는 어머니의 심정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43) J. Jeremias, Abba. Studienzur neutestamentlichen Theologie und Zeitgeschichte,
Goettingen 1966. 15-67; E. Moltmann-Wendel, Gott, unsere Mutter, 126.
44) J. Moltmann, Ich glaube an Gott den Vater. Patriarchalische oder nichtpatriarchalische Rede von Gott?, in: EvTh 43, 1983, 397-415, 408.
45) G. Lohfink, 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Freiburg 1982, 62.
46) 이러한 관점에서 하버만(H. Habermann)은 교회에서의 통합형태(Oekumenegestaltung)를 제시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신과 다른사람을 위해 용기를 갖고, 정의롭게 살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딸관계성(Tochterschaft)을 통해 열등감이나 양심의 가책, 또는 자신이 없고 기존 사회구조에 적응하려 하거나 불확실한 견해와 같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H. Habermann, Oekumene - oder: Frauen gestalten ihre Kirche und solidarisieren sich miteinander, in: PTh 30, 1995, 44-53, 53; 희랍어 '오이쿠메네(oikoumene)' 단어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W. Bauer, Woerterbuch zum Neuen Testament, 6. Aufl., Berlin/New York 1988, 1137이하; 말린 벤엘데렌,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WCC 연구자료 2, 이형기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214-224.
47) B. Dorst, Frauenbewegung als Therapie - feministische Therapie als Frauenbewegung, in: Wege zum Menschen 38, 1987, 308-318,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