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찬 글모음/기독교연합신문

어느 사춘기 여고생의 항거

행복한세상을만드는사람들 2015. 4. 29. 11:10

어느 사춘기 여고생의 항거

 

영미(가명)는 글솜씨도 있어서 백일장 같은데 나가면 입상을 빼놓지 않고 하고, 때론 장원을 하기도 하는 재주꾼이었다. 그런데 가정이 좀 불안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매일 다투기 일쑤였는데, 언제나 화근은 아버지의 술버릇이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신 날이면 집안은 전쟁터가 되었다.

영미는 그런 집이 너무나 싫었다. 학교 가는 것도 싫고, 자기 집 사정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 친구들도 회피하였다. 점점 고립되어 외로움이 엄습하였다. 그러한 고통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상담실에 올 때마다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던 영미가 몇 달간 보이지를 않다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반가워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나 놀라웠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와 보니까 또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어머니랑 대판 싸우고 있잖아요. 그래서 울며불며 말려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정말 죽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담담하게 말하던 그 학생은 어느 덧 흐느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날부터 그 학생은 약국을 돌아다니며 야금야금 약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드디어 자신의 결심을 결행하기로 한 날 약을 먹고 잠을 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넌 지금 여기 있잖아?”

난 너무나 놀라 다그쳐 물었는데, 그런데 천연덕스럽게 하는 영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런데요, 약이 모자랐나 봐요. 늘어지게 자고 오후 늦게나 되어서 잠에서 깨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그저 피곤해서 자고 있겠거니 했다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기도 해서 약간 책망조로 말했다.

너 그러다가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니? 너 다시는 그러면 안된다. 약속할 수있지?”

그 때 영미는 자조섞인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짜피 그래봤자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걸요. 이젠 절대 그럴 필요도 없어요.”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영미의 경우처럼 청소년들은 우울증과 같은 어떤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매우 충동적이라는 뜻이다. 친구와의 다툼, 부모의 꾸중, 경쟁에서의 패배, 학교 성적, 부모의 갈등과 다툼과 같은 가정환경 등이 자극원인이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여 풀어가기보다는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살시도에 비해 자살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확률은 낮은 편인데, 그 이유는 비교적 덜 치명적인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자살은 정말로 죽으려고 하는 의도보다는, 분노표현이나 자기주장, 자신의 괴로움 혹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그것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년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함께 관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라이프호프에서 펼쳐가는 청소년을 위한 무지개 자살예방교육이 바로 그런 노력 중의 하나인 것이다. (노용찬 라이프호프기독교자살예방센터공동대표, 서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