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박 에스더(본명 점동)는 1876년 3월 16일 정동 부근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딸 4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아펜젤러가 정도에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를 시작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던 터라 아펜젤러에게 고용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신학문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아펜젤러의 소개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을 접하고 회심하게 된다.
1888년 어느 폭풍우 심한 날 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박 에스더는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아 그때부터 박 에스더로 불렸다.
영어를 잘 했던 박 에스더는 그 당시 의료선교사였던 홀 부인의 조수가 되어
본격적인 의학수업을 받게 된다.
그후 홀과 함께 평양에서 의로활동을 벌인다.
1894년 청일전쟁 후 닥터 홀이 각종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서
혼자 남아 치료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자 홀의 가족은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때 박에스더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1896년 10월 1일에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0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나이는 겨우 24세를 넘은 때였다.
그러나 이때 그의 남편 박유산이 뇌일혈로 사망한 때여서 기쁨도 잠시였다.
다시 귀국한 에스더는 또다시 평양에서 홀 부인과 만났다.
과거는 미숙한 조수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동역자로
그와 힘을 합쳐 의료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를 도와 광혜원 건물을 신축하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고종황제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4월 13일 34세의 나이에
폐침윤이라는 질환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닥터 홀의 아들인 셔우드는
1928년 해주에 한국 최초의 결핵전문기관을 설립하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 씰’를 도입하게 되었는데,
이 뒤에는 박 에스더에 대한 아쉬움이 서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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