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용찬 글모음/기사스크랩

거절당한죄인, 인정받은 죄인

거절당한 의인, 인정받은 죄인
겸손은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내여놓는 것
입력 : 2010년 10월 24일 (일) 08:41:15 김재검 

성령 강림절 후 22주 본문
제1독서 : 렘 14:7~10, 19~22 / 제2독서 : 딤후 4:6~8, 16~18 / 복음서 : 눅 18:9~14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강한 욕구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꼽습니다. 사람은 존중을 받으며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하고 노력에 대한 칭찬도 받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나는 중요한 사람인가?',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가 시작된 후 인간 사이에 일어난 첫 번째 사건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쓰라린 상처에서 형제 살해가 나왔습니다. 이처럼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가장 근원적이고 강력한 욕구입니다. 그러기에 타인과의 비교는 의미가 없으며 주변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를 둘러싼 주변의 시선에서 무심해지기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오늘 성경정과 본문은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복음서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기네만 옳은 줄로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잘 들어라.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먼저 당당하게 자기를 뽐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기도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는 인상부터 받지만, 실제 바리새인들은 육신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해도 성경의 바리새인들만큼은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실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1년에 단 한 번 속죄의 날에 단식을 하도록 정하였는데(레 16:29)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월, 목)이나 단식을 하였습니다. 또한 밀과 술과 기름을 구입할 때에는 생산자에게만 십일조를 요구하였는데(신 12:17) 그들은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마 23:23)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어떤 것입니까? 바리새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살인하지 않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미워한 자는 살인한 자요,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겉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옳아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義)인데, 그 의는 우리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한 의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경건한 생활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공로로 내세우는 거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사람이 보기에는 의롭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더러운 옷'(사 64:6)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은 그 더러운 옷을 걸치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했던 것이니 어찌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그러기에 마르틴 루터가 우리 주님이 올라가셨던 빌라도 궁전 스물여덟 계단을 무릎이 까지도록 올라가는 행위로 의롭다 함, 곧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 못 얻고 오직 하나님 앞에 우리와 인류의 죄짐을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줄(롬 1:17) 확신하고 종교 개혁의 공을 세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稱義)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엡 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벗었음'을 자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피 흘려 죽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그 옷이 바로 우리와 인류 속죄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에는 세리도 등장합니다. 당시의 세리는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세리는 로마에 주권을 빼앗긴 이스라엘의 약한 사람들을 위협해서 돈을 빼앗고 권력을 이용해서 부당하게 세금을 거둬들여 일부는 착복하고 일부만 로마에 바쳤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창녀처럼 여기고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리들이 비록 죄는 많이 지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비유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자신의 경건과 공로를 내세우고 스스로의 의로움을 과시하며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서 있는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섰습니다. 그리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눅 18:13)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은 "잘 들어라.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복음 본문의 세리처럼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로 겸손은 영성 생활의 최고봉입니다. 모든 덕은 겸손으로 모아지고 모든 기도는 겸손으로 귀결됩니다.

크리프트라는 사람은 겸손에 대해 아주 뜻있는 말을 했습니다. "겸손이란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말하면 겸손인 줄 알지만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의 마음 중심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말로써 자기를 부인해도 속으로입니다. 교만은 살인, 정욕, 미움, 탐욕 등과 같이 큰 죄입니다.

그리고 이 교만은 인간 속에 있는 악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그 어느 누구도 교만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겸손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한번은 기도하고 있는 한 수도사 앞에 마귀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다." 이 말을 들은 수도사가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나는 미천한 종이라 천사의 방문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 순간 마귀가 떠나갔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보듯이 기도의 능력은 겸손에 있습니다.

구약 본문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겸손히 자신을 성찰하여 회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도 서신서에서 (6절-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16절-나를 버리고 간 그들이 엄한 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앞둔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도 더욱 뜨겁게 주님을 사모하며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간 자들을 원망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겸손히 기도하였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도 겸손의 왕 그리스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롬 14:17)를 누리며 살고, 그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