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남목사와 가야교회 이야기
요즘 신문을 보면 온통 서로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사건 사고에 관한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가끔은 좋은 소식도 전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이미 황색 신문(Yellow Paper, 혹은 Yellow Press, 선정적인 신문을 지칭하는 말)으로 변한 지 오래다. 그래서 신문을 읽기가 거북할 때가 있다. 교회에 관한 기사들을 읽을 때는 마음이 아리기도 하다.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얼굴을 들기가 어려운 이야기들이 전해지곤 할 때마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교인들을 피하고 싶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신문을 읽다가 정말 내 마음을 울리는 기사를 보았다. 다음은 뉴스앤조이에 실린 한 작은 교회 목회자의 이야기이다. 나도 작은 사회봉사단체를 통해서 작은 교회와 삶을 나누는 운동을 하는 한 목회자로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록에 남기기로 하였다.
“아이가 둘 있는 권영남 목사(33·개야교회, 강원도 홍천 서면 개야리 소재)의 사례비는 30만 원이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 교인이 20명인 교회가 재정이 넉넉할 리 없다. 그것마저도 2년 넘게 받지 못했다. 그래도 굶지 않는다. 다 방법이 있다.
처음 사역할 때는 쌀이 떨어지면 교인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교인들이 쌀을 가져다줬다. 5년을 함께하니 이제는 쌀 떨어지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명절에는 평소보다 쌀이 많이 들어왔다. 평소 부모님께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해 가슴이 아팠는데 그 쌀로 가래떡을 만들어 친척들까지 나눌 수 있었다.
아이가 아파 굶주림을 면한 적도 있다. 큰아이가 가와사키라는 심장병에 걸렸는데 아는 사람들이 위로금을 줬다. 권 목사는 아이가 아파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서운하다고 했다. 지금 아이는 완치됐다. 작년에는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차가 받았다. 그 보상금으로 한 해를 살았다.
먹고사는 것뿐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돈들도 어떻게든 해결됐다. 권 목사는 작년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젊기 때문에 세포 활동이 왕성해 빨리 치료받아야 한다고 했다. 한 달 약값만 200만 원이 넘었다. 약값을 충당하기 위해 아내 최미애 씨가 도시에 가서 돈을 벌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됐다. 의사가 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줬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 달에 2만 원의 약값이 든다.
최미애 씨는 이런 삶을 행복하고 감사한 삶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목회하는 거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봐요. 이야기를 들어 보면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으냐는 거죠. 우리는 다 행복한데 경제적인 것 하나만 힘들어요. 그런데 도시 사람들은 다 힘든데 경제적인 거 하나만 좋다고 하니 더 불행한 것 같아요. 작년에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올 때는 '네가 참 힘들게 사는구나' 했는데 갈 때는 '참 행복하게 산다'고 하더라고요. 남들이 봤을 때 행복하게 보이니깐 참 감사해요.’”
권영남 목사 목회하고 있는 가야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남을 돕고 있는 교회이다. 중국선교를 돕고, 해외아동을 위한 선교사역을 돕고, 미자립교회를 돕고, 지역 초등학교를 후원하고 있다.
그 외에도 문화강좌를 통해서 천연비누만들기, 피아노 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거리를 좁히며 열심을 다해 섬기고 있다.
우리는 종종 없어서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이 어폐가 있다는 것을 권영남 목사가 목회하고 있는 가야교회가 증명해 주고 있다.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려고 해서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왜 부끄러워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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