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과 성장 드라이브에 관한 고민
나는 인천의 작은 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10평형이었다. 세 식구가 살기에는 좁은듯하면서도 그렁저렁 살 만한 공간이었다. 10년이상을 살았는데, 재개발 이야기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좋았다. 새 집이 생기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 아파트 단지에는 노인가족이 많았는데, 그들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왜일까?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나에게도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개발이 되어도 나는 새집에 입주할 수 없었다. 오른 입주금을 마련할 돈이 없는 것이었다. 갑자기 만감이 교차했다.
서경석 목사가 이런 저런 욕을 먹더니 최근에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일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한때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경제정의실천을 위해서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을 이끈 주축이고, 또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인데, 어느날 갑자기 목사직을 내놓더니 탈북자를 위한 일을 한다며 만주벌판을 오고가다가 조선족 교회를 설립 담임목사로 다시 등장하였다. 그러다가 뉴라이트에 관여하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재개발에 대한 이의를 들고 나온 것이다.
성장과 개발은 언제나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권력자들에게는 좋은 명분이다. 그리고 열심히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명분들이다.
그런데 성장과 개발의 음지에는 언제나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이 문제이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인류역사에 그런 어두운 그림자는 너무나 많이 발견된다. 최근에 '용산참사'로 대변되는 도심재개발의 어두운 그림자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애써 어두운 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외면하면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실은 개발론자들과 같은 생각이다. 부와 명예와 자기중심적인 편리함이다.
마침 이에 대한 분명한 자료와 또한 객관적인 생각을 잘 담은 글을 읽게 되어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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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없는 개발, 생명 없는 발전(갈무리한 글)
오래되고 낡은 공간을 개발하는 도시재생사업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어차피 노후한 주택은 시간이 흐르면 새롭게 정비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개발이 일부 사람들을 희생시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한국에서의 개발은 참 손쉽게 이루어지는 한편 그 이면에는 수많은 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수도권도 20년을 주기로 대규모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땅문서나 집문서가 있는 사람들은 보상을 받지만 사실 노후한 건물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세입자들은 그곳에 생활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사용자들인데 당장 자기 삶의 터전에서 쫒겨나야 함은 물론, 상가의 경우 막대한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 등을 고스란히 날려야 한다.
20년마다 반복하는 개발, 끝나지 않는 상처
1970년 전후, 서울의 판자촌을 옮기는 과정에서 대규모 폭동이 벌어졌다. 당시 서울시 인구의 10%를 수용할 수 있는 신도시(광주 대단지-현재의 성남)를 만들어 판자촌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켰다. 서울과의 버스 교통도 제대로 안 되고 불하받은 땅의 세금마저 높아 폭동이 일어났다. 파출소가 불타고 성난 주민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인구의 8%정도를 옮긴 후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 뒤 한동안 잠잠하다가 1990년대 전후 무렵, 1970년 전후에 집단 이주로 조성된 지역을 이번에는 아파트로 바꾸는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동, 사당동, 상계동 등지의 판자촌에서 세입자들의 투쟁이 터져 나왔다. 서울 시민 10% 이상이 살아가던 판자촌을 일시에 아파트로 개발하다 보니, 임대료는 오르고 갈 곳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22명이 죽고, 수십 명이 구속되고, 수백 명이 다쳤다. 당시 한국과 남아공이 가장 비인간적인 철거를 자행하는 국가로 지목받고 유엔 인권위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난 뒤에야 개발이익의 일부로 세입자를 위해 영구임대주택을 건설하고 입주 시까지 가(假)이주 단지를 조성하도록 제도화했다. 2003년 참여정부는 주거권이란 개념을 도입하고 4인 가족의 최소 주거 기준을 11.3평으로 정하여 법률로 공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획기적인 법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다시 20년이 지난 2010년 서울 전역은 뉴타운 등 27개의 뉴타운 개발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200여 곳의 개발이 동시에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까지에 비해 서울 거주 가구의 15% 이상이 영향권에 들어가는 훨씬 광범위한 개발이니, 용산 참사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2006년부터 10년까지 13만 6,346호의 주택이 멸실되는 반면 6만 7,134호가 공급될 예정이어서,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오히려 주택 수가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한다. 더구나 새로 지은 주택은 넓고 비싼 집이 대부분이다. 전용면적 60㎡ 이하 비율은 사업 전에 63%이던 것이 30%로 줄어든다. 개발 전에 평균 전용면적이 80㎡이지만 개발 후에는 107㎡로 늘어난다.
개발 전에는 서울의 평균 주택가가 3억 9,000만 원이지만 개발 후에는 5억 4,000만 원으로 증가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개발 전에 전체 세입자의 83%가 전세가 4,000만 원 미만의 서민용 주택에서 살지만, 개발이 끝나면 4,000만 원 미만의 주택은 0%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지금 서울에서 세를 살고 있는 83%는 서울 밖으로 쫒겨나야 한다.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 공청회 자료, 2009. 1. 15-김수현, '용산 참사와 도시재생사업의 근본 대안', <용산 참사와 토지 문제 심포지엄>에서 인용)
이것은 결국 서울에서 서민들은 살 수 없게 되고, 새로운 빌딩과 아파트로 단장한 서울은 중산층 이상만이 거주하는 도시로 변하며, 당연히 정치적으로는 보수 일변도의 성향을 가지기 쉽다는 뜻이다.
이렇게 주민 수준과 동떨어진 중대형 고가 아파트가 건립됨에 따라 원거주민의 재정착률은 10% 안팎에 머무른다. 길음 4구역의 경우, 가옥주 등 소유자는 15.4%, 세입자까지 포함할 경우는 10.9%만이 그 지역에 다시 입주하게 된다. 90% 가까운 주민들은 개발 사업 이후에 그 지역을 떠나야 한다. 이는 비단 길음 4구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일이다.
재개발 지구 여기저기서 "속았다"는 구호들이 나붙고 있다. 애초 재개발 동의를 받을 당시에는 '적은 부담으로 큰 집'을 받는다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담이 늘어나면서 결국 '내 집을 날렸다'는 식의 불만이 일고 있다. 게다가 조합 집행부의 불투명한 사업 추진과 비리가 제기되고 소송에 소송이 꼬리를 물게 된다. 수십 년 함께 살아왔던 서민 주거지가 졸지에 송사와 집단 민원의 진원지로 변했다. 그 배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재개발 사업을 수주해서 빨리 추진하려는 건설 업체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소수의 부 창출 위한 개발, 하나님의 공의 조롱
집이나 도시 등 건축은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지 건축 자체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특정한 사람들의 부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건축은 공공복리에 부합하고 인간과 자연의 존엄성을 지켜 갈 목적 아래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 중심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있고, 생명이 있고, 함께 이루어 가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이런 목적을 벗어난 탐욕의 콘크리트 숲은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원주민들의 재정착율이 10.9% 불과한 재개발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진행되어야 하며,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가난한 사람을 내쫒고 부자들만이 땅을 독식하기 위한 개발을 예언자들은 혹독하게 비난한다. (사 5:7-9, 미 2:1-3)
개발업자는 막대한 부의 증가를 가져오기에 개발이익의 25%를 개발 부담금으로 납부한다.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제13조) 그중에 50%는 토지가 속한 지방자치단체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국가균형발전 특별회계에 귀속된다. (4조) 그동안 정부는 용산 참사를 민간과 민간의 문제임으로 개입할 수 없다고 발뺌해 왔다. 그렇다면 망루에 올라간 첫날 경찰 특공대를 투입한 것도 설명이 되지 않을 뿐더러, 실제로 개발이익을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나누어 먹게 되어 있다. 현행법은 개발업자가 임의대로 가격을 조작해서 신고하기도 쉬울뿐더러, 세입자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하면서 뒤에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까지 합세하여 이익금을 나누어 먹는 구조이다.
개발이익 환수금을 배분하는 체계에도 실제로 희생을 당하는 세입자들은 제외되어 있다. 적어도 개발이익의 절반 정도를 환수하여 그것을 개발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각종 규제 완화를 통해 보다 신속하게 개발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경우 소유주와 개발업자에게는 매우 유리하지만 쫒겨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폭력이 가해진다. 용역 깡패를 동원해 밀어붙이는 속도전을 펼치다 보니, 법의 법위도 넘어서게 되고 국제사회가 금하는 한겨울 철거도 감행하게 된다.
영국의 경우는 우리나라 권리금과 비슷한 개념의 영업권(Goodwill)이 있는데, 이주 등으로 인하여 영업권에 손실이나 침해가 올 경우는 직전 3년간 영업 이익 평균 액수의 2배 내지 5배를 영업권 가치로 보상한다. 상가에서 관행적으로 요구되는 권리금은 상가를 사용하는 대가로 내는 것이다. 만약 계약 기간 내에 원활한 영업권이 보장되지 못할 때 이를 법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하며, 그 원인을 제공한 측에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약정 기간 동안 사용권(영업권)이 보장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변상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한 재건축 기간에도 계속해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대체 상가나, 임시 상가 등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주민들이 함께 기뻐할 수 있다. 개발업자나 소유주가 조금 적게 이익을 취하고 세입자들도 함께 그 열매를 나눌 수 있게 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나 국가가 이익금을 나누어 먹을 것이 아니라, 주택은 공공복지의 기본임으로, 오히려 공적 기금을 세입자를 위하여 투입해서 재개발을 진행한다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기뻐하는 개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개발이 될 것이다.
화려한 도시의 건축물 뒤로 쫓겨나는 사람들의 한이 서려 있고, 가족이 파괴되고 생존권이 위협받는다면 그것은 인간 없는 개발, 생명 없는 발전일 뿐이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개발에 대해서 혹독한 비난을 퍼부으며 그것의 멸망을 예언한다.
"너희는 백성을 죽이고서, 그 위에 시온을 세우고, 죄악으로 터를 닦고서, 그 위에 예루살렘을 세웠다." (미 3:10)
"담에서 돌들이 부르짖으면, 집에서 들보가 대답할 것이다. 그들이 너를 보고 '피로 마을을 세우며, 불의로 성읍을 건축하는 자야, 너는 망한다!' 할 것이다." (밥 2:11)
땅은 하나님의 것, 공적으로 관리해야
성경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 (레 25:23)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은 땅은 누구나 필요하기에 공(公)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단지 땅에 몸 붙여 살다가 자기 생명이 다하면 땅을 두고 떠나야 한다. 인간은 결코 땅의 소유주가 될 수 없다. 그러기에 땅을 아주 사고팔아서는 안 되며, 땅을 파는 것은 단지 희년까지의 사용권, 경작권을 파는 것이다. 희년은 본래 평등하게 나누어 받은 땅(히브리어-나할)을 원래의 가문에 되돌리는 해이다. 부득이한 경우 땅을 팔더라도 희년까지 남은 햇수를 계산하여 그때까지의 사용권을 파는 것이다. (레 25:27 이하) 이것은 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집도 땅과 함께 희년에 되돌려야 할 대상이다.
서울에서 다시 한바탕 일어날 것으로 예고되는 철거민 투쟁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 철거민과 세입자 대책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 국가의 재정으로도 하기 힘든 일이기에 교회가 돈을 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 비용을 들여서 '시혜적-자선적인 선교'를 하는 것보다 훨씬 값있는 일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철거를 당하는 세입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가 인정되고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개발이 되도록 법을 고치고, 제도를 고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다.
사실 돈을 가진 것은 기업이나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이다. 그들이 서민과 약자들 편에 서서 정당하게 재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여론을 일으키고 법이 잘못되면 법을 고치고, 제도가 잘못되었으면 제도를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러한 선교를 '해방적 선교'라고 부른다. 자선적인 선교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면 대교회로 가야 한다는 논리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해방적 선교는 오히려 몸이 가벼운 작은 교회에서 더욱 잘 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고난 받는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에 단지 모인 돈을 온라인으로 보내 주는 온라인 선교에 비해 훨씬 신앙적인 선교이다.
용산에서 희생당한 이상림 집사님 가족이 적을 두고 매일 새벽 기도를 나가던 교회에서 한 번도 문상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뉴스앤조이> 기자가 교회에 물었더니, 교인의 반은 조합원이고 반은 철거민이라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그리스도는 거기 머무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은 교인들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리스도가 주인이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가 만약 거기에 계시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한국교회는 모인 회중을 위해 존재하는 서비스 기관이 아니다. 가난한 자와 약자들 편에 서며 그들의 한을 대변하고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 때, 교회가 정의의 편에 서서 할 말을 할 때,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다.
김경호 / 들꽃향린교회 목사·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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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창1:26-). 하지만 이 명령은 착취의 명령도 아니고, 파괴의 명령도 아니고, 탐욕을 위한 명령도 아니다. 관리하고 지키라는 명령이다. 교회는 과연 무슨 고민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때로 우리는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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