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 체험을 했는가? 나의 삶은 예수를 만나 변화되었는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그 무엇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무슨 뜻인가?

히틀러의 나치즘 치하에서 기독교 신자의 정체성(正體性), 그리고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독일의 예언자적 목사요 탁월한 신학자였던 본회퍼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의 전 존재의 전환이 일어나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이것은 초월 경험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전적인 자유 안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서 비로소 전지, 전능, 편재가 유래한다. 신앙은 예수의 이런 존재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렇다. 예수는 '자신의 전적인 자유 안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그러한 삶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연대하여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사회를 만드는 일에 목숨 바쳐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역사의 서글픈 아이러니다.

예수의 제자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일체의 권력과 제도와 이념에 맞섰던 예수 운동의 핵심 인물들은 운동의 지도자인 예수의 일견 무기력한 십자가 죽음에서 그들 앞에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 있는 현실의 두꺼운 벽을 느끼며 한동안은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을 절망과 망연자실 한복판에서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예수를 만나 하늘을 날던 꿈같은 세월. 갈릴리의 어중이떠중이 농민이나 뱃사람이나 말단 세리였던 그들이 예수와 만나 불의한 현실에 눈뜨고, 현실 너머의 새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 꿈을 하나 둘 예수 운동으로 펼치던 고달프면서도 행복했던 날들. 예수를 만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자신들의 영적인 키를 보면서 자랑스러웠던 날들….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다니며 그에게서 느꼈던 깊은 인상들, 예수의 말씀과 행동들에서 그들이 받았던 가슴 벅찬 감동들, 예수의 여러 하나님 나라 비유들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자유와 사랑과 평등과 정의의 아름다운 인간 세상에 대한 꿈…. 이것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마음 한구석에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그들은 소스라치게 발견했다.

이윽고 그들은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비록 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생명 사랑·민중 사랑의 고귀한 정신(靈)은 아직도 우리 한가운데 살아 있다! 그 죽음은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했던 자의 죽음, 바로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다! 세상 권력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진리의 목소리를 잠재우려 했지만, 진리는 무덤에 갇힐 수 없다. 예수가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겨 준 생명 사랑·민중 사랑의 정신이 망각되지 않는 한, 예수는 결코 죽은 게 아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의 분신이다!

이것이 그들의 예수 체험이었다. 부활 체험이었다. 예수가 생명 사랑·민중 사랑의 활활 타는 불꽃으로 살고 죽어 따뜻한 인간 세상의 '밀알 하나(요 12:24)'가 되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예수의 뜻을 이어 살아야 한다는 '초월 경험'이 필요하다. 이 믿음은 예수의 죽음으로 얻어진 믿음이었다. '은총'으로 베풀어진 믿음이기도 했다.

이제 물음은 나로 되돌아온다. 예수를 만나 '전 존재의 전환이 일어나는 초월 경험', 나에게는 이런 예수 체험이 있는가? '자신의 전적인 자유 안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산 예수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의 이런 존재에 참여하는' 믿음, 나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