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일찍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을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 하나는 생의 본능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본능이다.
생의 본능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누구나 살려고 하는 본능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러이트에 의하면 자기보존을 위한 생식과 성과 관련된 본능이 여기에 속한다. 그 에너지를 리비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비도는 처음에는 성적 에너지로만 여겼으나 나중에는 살려는 본능자체로 넓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리비도는 단순한 성욕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또한 그와 관련하여 행복을 추구하며 살려는 욕구의 총체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본능은 좀 낯설게 느껴진다. 과연 죽으려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을 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조금 시각을 달리해 보면 종종 사람들이 스스로를 망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은 먹어야 사는데, 영양실조상태가 되어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거식증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그 유명했던 카펜터즈의 여성 멤버였던 카렌 카펜터도 거식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여성 모델 중 한 사람이었던 이사벨 키로도 거식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마약이나 술과 같은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경우도 살펴보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중독적인 행동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계속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학이나 자해행위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면도칼이나 유리 조각이나 핀을 삼키는 사람, 칼로 자기 신체에 상처를 내는 사람 등등...
프로이트가 죽음의 본능의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은 아마도 모든 생물체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고, 그것은 바로 무의 상태, 즉 죽음의 상태라고 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모든 생물체의 목적은 결국 죽음이다”라고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인생주기의 마지막이 과연 죽음일까?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한 개인의 죽음이 그 사람의 끝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의 생의 족적과 영향은 그 후손과 후대에 그대로 남겨진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표준새번역)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은 “자기 목숨을 스스로 살해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죄일 뿐만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나 이유가 있든지 간에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살을 해서도 안되며, 자살을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동조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과 그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오히려 자살을 예방하고, 그러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유가족을 돌보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나아가 자기 파괴적인 공격성의 근원을 발견하여 치유하고 회복을 돕는 생명보듬이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을 나누며 살아가는 일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용찬(라이프호프기독교자살예방센터공동대표, 서호교회)
'노용찬 글모음 > 기독교연합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을 보는 시각을 넓혀주자! (0) | 2015.04.29 |
---|---|
생명을 보듬고 살린느 교회가 되어야 (0) | 2015.04.29 |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적 문제인가 (0) | 2015.04.29 |
행복 전도사의 역설적 죽음이 던지는 메시지 (0) | 2015.04.29 |
어느 사춘기 여고생의 항거 (0) | 201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