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묵상20201022>
제목 : 요구와 약속
본문 : 누가복음3장1-17
누가복음 3장부터 5장까지를 읽으면서 생각해 봅니다.
누가복음 3장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2절 중반부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3절에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이며, 천국(하나님 나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약속입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요한에게 나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세리들, 군인들, 그리고 무리들이었습니다.
○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12:34절과 23: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사용하신 꾸짖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요즘의 언어로 한다면 상대에 대한 심한 욕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심한 말까지 하면서 그들을 책망하셨을까요?
그들을 향한 책망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아무런 실천도 없고 행동도 없는 무기력한 신앙에 대한 책망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율법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그에 대한 세부적인 규칙에만 집착한 나머지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히 하는 모습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화 있을진저”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일곱 가지의 책망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러한 말씀들을 요약하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율법이나 그 세부적인 조문들을 주장하기보다, 그 율법의 정신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열매가 따르지 않는 형식적인 회개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8, 9)
○ 오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왔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의롭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왔지만, 그러나 정작 회개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이들은 전혀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오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요한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성경은 그들은 무리들, 세리들, 군인들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절).
무리들, 세리들, 군병들은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회개의 설교를 들을 때에 다른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죄를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거듭남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맺어야 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 먼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 무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대답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11절)
이것은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비를 요구하지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복음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행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과 의복은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필수품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지시하시는 대로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단지 소유하고 있으려고만 하지말고 그것을 서로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두 번째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 세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대답합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13절)
그 당시 세리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작은 권력을 이용해서 치부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거두어 주고, 그 이상을 취하여 재산을 모으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세입은 공적인 일에 쓰여져야 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리들에게 그들의 직위를 사임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직업 자체는 합법적이며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일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 세 번째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 군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역시 대답합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14절).
이 군인들은 로마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한 초기 사례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 군인들의 물음에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하지 않고, 군인들이 보통 범하는 죄에 대하여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그들이 주둔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할 일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니, 누구에게든지 강포하지 말라”고 합니다. 즉, '누구도 위협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말라, 전쟁의 칼과 정의의 칼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보호물이 되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고 뇌물을 취하기 위하여 정부에 없는 일을 꾸며서 고소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은 동료 군인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없는 일을 꾸며서 고소하지 말라는 경고가 군인들과 특히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동료 군인들을 특별히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상관에게 가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는 것은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족하다고 다른 사람의 것을 힘을 써서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온전한 회개가 있다 하더라도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것을 덧입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눅3:16-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거듭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음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요1:12-13, 3:3-6).
성경말씀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대해서 진실하게 회개하며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령의 불이 임하는 능력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 <결론>
세례자 요한의 지적처럼 열매가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머릿속으로만 하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적 행위는 진정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진정한 교인과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교회를 정의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모임인 신앙공동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옳다’하는 모든 자만과 불의와 거짓을 버리고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자비하심의 선물로서 거듭나게 된 것이며, 이러한 거듭남은 우리 삶의 변화와 그 열매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에베소서 2장 8-9절의 말씀처럼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기에 그러한 신앙의 모습의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회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구원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12).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왜 우리에게 성령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져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 충만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며, 거룩한 성전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전파하는 사람들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와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2:37-42)
이제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촉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급박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모든 행위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앞에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구별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 회개의 요구에 진정으로 응답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구원의 기쁨과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처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들로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소리, 광야에서 외쳤던 그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진정으로 회개하며 자신을 개혁했던 것처럼, 지금도 매일 매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스스로를 개혁해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
또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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