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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용찬 글모음/목회와신학

목회자 자녀들은 언제 상처를 받는가?

목회자 자녀들은 언제 상처를 받는가?


노용찬(인천가정문화원)


여는말


사회가 어렵다 보니 마음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마음에 상처를 주는 요인들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원인이 가정적인 문제이거나 가족간의 관계 문제가 대부분인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홈즈와 레이(Holmes-Rahe)가 조사한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들을 조사해 보니 상위 12가지 중 7가지가 가족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만큼 고통이나 스트레스에 있어서 가정이 주는 영향은 크다. 그런데도 종종 우리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의 원인을 가정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고, 또 그런 이유들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성장발달과정을 생각해 볼 때에 가정의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가정은 한 개인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는 양육환경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부모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어떻게 보면 자녀의 희로애락은 절대적으로 부모가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생각은 아닐 것이다. 부모의 생각, 감정, 행동, 직접적인 말, 가르침 등등이 그대로 자녀의 정서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자녀들의 문제를 그들 자신만의 문제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타고난 성격이나 본성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자녀들이 받는 외부적 영향에 대해서는 잘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부모의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기를 꺼려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더 심한 것 같고, 목회자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기를 힘쓰고, 또 직접적으로 그 일을 천직으로 알고 열심을 다하고 있는 목회자의 자녀들은 어떤 이유로 마음에 상처를 받는가? 그렇게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목회자의 자녀들은 종종 비뚤어지는가?


펼치는 말


대체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의 자녀들은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것은 왜 교육자 자녀들이나 목회자 자녀들이 한 번 비뚤어지면 그렇게 심하게 비뚤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목회자 자녀의 경우는 더욱 궁금했다. 그렇게 기도하고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종종 자녀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 가정이 많이 있다.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아서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첫째는 목회자 부모가 너무 권위적이거나 완고하고 율법적인 신앙관과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3년 전쯤으로 기억되는데, 한 자매가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 자매는 심한 정신적 장애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자매를 괴롭히는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가정환경과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자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양육태도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매의 아버지는 권위적이며, 완고하고 율법적인 신앙관과 생활태도를 지닌 분이셨다. 가족들과의 대화도 형식적으로 메마른 대화 이외에는 거의 없었으며,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의 역할이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그저 교회와 교인들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는 목회자였다. 그 자매는 그러한 아버지가 다가갈 수 없는 두려운 존재였다. 언제나 자신의 잘잘못을 따지고 야단치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 앞에서 변명이라는 것은 통할 수가 없었다. 점점 커가면서 그 자매의 마음에 일어나는 갈등은 아버지의 삶이 모순된 것처럼 느끼는 것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성장하면서 점점 내부에는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분노, 그리고 적개심이 커져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정서적 고통을 신앙으로 해결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참다못해 친구들이나 학교 선배들에게 말해보아도 기도가 부족하다거나, 성령 충만치 못하다는 책망 아닌 책망조의 말만 들을 뿐이었다. 이제는 신앙적인 갈등까지 갖게 된 자매에게 더욱 어려움을 주었던 충격적인 사건은 대학 신앙써클의 경험이었다. 회원들이 모여 서로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시간들을 통해 듣게 된 내용들이 더욱 힘들게 하였다. 회원들은 회개의 시간에 둘러 앉아 한 주간 동안 겪었던 일들을 서로 고백하는데, 때때로 성폭력이나 비윤리적인 경험들도 고백되었. 완고하고 엄격한 목회자 가정의 영향으로 아직 세상적 경험이 없는 순진했던 그 자매에게는 회원들의 입을 통해 고백되는 일련의 경험들은 또하나의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어떤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말하는 자나 듣는자 모두가 수용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며 자발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신앙써클은 그러한 배려가 없이 일방적으로 회개를 강요하는 율법적이고 속박적인 분위기였다. 아직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을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그 자매에게는 그러한 분위기가 자신이 속했던 가정과 같은 또다른 억압의 현장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 보다 더 가중시키는 겪이 되었다. 내부의 두려움과 분노는 점점 가중되었고, 급기야 타인을 향하여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식구들에게 화를 내고 행동이 거칠어졌다. 사람을 보면 미웠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자매의 경우는 목회자인 아버지가 너무 권위적이며 완고하고 율법적 신앙관과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자녀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대표적인 예이다. 


  둘째는 목회자 부모가 너무 교회와 교인들 문제에 빠져 자녀들을 돌볼 겨를이 없는 경우이다.

  성인아이 치유그룹에서 만났던 K 자매의 경우도 아버지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었다. K 자매가 성인아이 치유그룹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K 양의 괴로움은 자신이 마치 진실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것 같고 누구에겐가 버림받은 것 같은 느끼는 것이었다.

  K양은 목회자의 장녀로 태어났다. 교회를 막 개척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도를 위해 언제나 K 양을 교인 집에 맡겨 놓고 함께 나가셨다가는 늦게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그 때마다 K 양은 마치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고, 부모님들께서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한 부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심해졌고, 자신이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왠지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고,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 고통스러웠다. 순간 사춘기 특유의 일탈행동에 대한 유혹이 있었으나, 그래도 목회자 가정의 자녀라는 의식이 그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게 해 주었다. 간신히 사춘기를 탈출한 K 양은 자신의 정체감의 문제와 정서적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하였다. 하지만 K 양은 치유그룹에서 “나는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한없이 벗겨도 속이 나오지 않듯이 내 속에 무엇이 있고,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아주 극단적인 예도 있다. 서울에 있는 모 교회에 가정생활 세미나를 인도할 때 그 교회 집사님께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자신이 아는 어느 분은 목회자 딸인데도 주일에는 교회에 가질 않고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가 오직 교회 일에만 얽매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 너무 마음에 상처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자녀들과 함께 지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K 양의 경우와 같이 목회자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나 교회 일에만 열심을 다하고 자녀들을 돌보지 못해서 겪게 된 고통의 예이다.


  셋째는 목회자 부모가 자기 자녀를 공평하게 대하지 못했을 경우이다.

  어느 교회에 저녁 예배에 설교를 하러 갔을 때 경험하였던 경우이다. 교인이 100여명 되는 개척교회였는데, 임대건물이다 보니 자모실이 따로 준비되어 있질 않아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소란스러워 예배진행에 조금 방해가 되었다. 설교시간이 되어 설교를 하는데, 담임 목사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떠드는 아이들을 모아서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조금 있으려니까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소란스럽게 났다. 아마도 보이지 않으니까 더욱 신나게 뛰어 노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앉아있던 담임목사는 다시 일어나더니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이들 소리는 잠잠해져서 예배를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의 이야기였다. 예배후 다과를 함께 하면서 어떻게 해서 아이들을 그렇게 잠잠하게 했냐고 물었더니, 그 사정이 너무 안타까웠다. 외부 목사님을 모셔놓고 아이들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것이 실례라고 생각한 담임목사가 아이들이 노는 방으로 들어가 보니 중구난방으로 뛰어 노는 아이들이 너무 기가 막혔다. 어떻게 해야겠는데, 집사님 아들도 있고, 괜히 그 애들을 야단쳤다가는 문제가 일어날 것 같아 고민인데, 마침 자기 아들이 눈에 띈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희생양 삼아 나무 빗자루로 자루가 부러지도록 때려주었더니 그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도 겁을 잔득 먹고는 모두 조용해지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목사님의 아들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들고 뛴 것은 자신만이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죽도록 맞아야만 하지?”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장차 그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것이 남을까? 여기까지 생각할 때는 그 아이의 장래가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넷째는 너무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성장하는 경우이다.

  종종 교회에서는 목회자 자녀라는 것 때문에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 특별한 취급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목회자 자녀이기 때문에 무조건 잘해주는 경우이다. 교회학교에서 종종 경험하는 일인데, 예를 들어 성경퀴즈를 해도 목회자 자녀이기 때문에 우선권을 준다는 지, 발표회 때에도 가장 좋은 배역을 준다든지, 잘못을 했을 때에도 그냥 넘어간다든지 하는 식의 특별대우이다. 다른 하나는 “너는 목회자 자녀이면서 왜 그 모양이냐?”하는 식의 특별 대우이다.

  어느 경우이든 “너는 목회자 자녀이기 때문에 이래야 한다”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이러한 경우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과 행동에 제한을 받는다. 잘해도 문제가 되고, 못해도 문제가 된다. 부모가 목회자라고 해서 자녀도 목회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가정의 자녀처럼 자연스럽게 생활할 자유가 있다. 그것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특별한 대우는 좋은 것 같지만 목회자 자녀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 중의 하나가 된다.


  다섯째는 목회자 자녀들을 매사에 너무 신앙적인 눈으로만 대하는 경우이다.

  전화상담의 경우인데, 한 50세쯤 되는 여성이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은 현재 남편과 헤어져서 한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심한 내적 갈등으로 거의 생활의 의욕이 잃고 있었다. 그 여인이 전화를 통해 한 첫마디는 “목사님, 저는 너무 죄가 많아요. 하나님 앞에 나는 정말 못한 사람이죠?”라는 말이었다. 앞뒤 설명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그 여인의 어린 시절은 누가 보면 가장 신앙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3대 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 부모는 자녀를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주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아이가 어쩌다 실수를 하면 “너,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야단을 쳤다. 어떤 감정을 나타내면“하나님은 그런 것을 미워하셔!”라고 말하면서 감정조차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여인의 부모는 자녀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였다. 부모는 좋은 의도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그런 말을 들으며 성장한 그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존재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느낌은 지나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하였다. 결국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열등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결혼을 실패로 몰아갔고, 이제는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성장발달과정을 무시한 채로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일방적인 목표와 방향으로 자녀를 몰아감으로써 일어난 비극적인 경우였다.


  여섯째는 목회자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모순을 발견하는 경우이다. 즉, 교회나 교인들에게 비춰지는 아버지의 모습과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보여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모순될 때 자녀들은 심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목회자 부부간의 모습이 건강하지 못할 때 자녀들은 심한 상처를 받게 된다.

  부부가 서로 갈등하거나 심하게 다투는 모습이 자녀들에게 상처가 되는 것은 일반 가정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목회자 가정의 경우는 더욱 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생활의 가치나 윤리 도덕의 기대치가 다른 가정보다 높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자녀들이 부모의 모순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게 한다. 더 나아가 부모가 자신들의 문제를 부정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진실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 자녀들은 심한 내적 갈등을 하게 된다.

  자녀들이 겪는 목회자 가정의 모순은 신앙적인 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실제 생활의 가치가 다를 때 자녀들을 내적 갈등을 넘어 수치심과 분노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마치는 말


  그러면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이 상처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일반 그리스도인 가정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목회자는 또한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가장이다. 그 역할에 충실할 때 자녀들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자녀들에 대한 헌신이다. 자녀들이 목회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는 자녀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다.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그들의 정서발달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관, 생활태도, 감정표현 등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변덕스럽지 않아야 한다. 너무 권위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아야 한다. 스킨십과 애정표현이 일관성 있게 있어야 한다.

  넷째는 자녀들을 보호하고 필요들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내 자녀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일이 절대로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바울은 믿는다 하면서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믿음 없는 자들보다 더 악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자녀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대화의 창을 마련하는 일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를 멀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바쁘기 때문에 오히려 일정한 시간을 정해 자녀와 함께 하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은 하루에 30분은 반드시 자녀들과 함께 하루를 어떻게 지냈지는 지를 이야기한다고 하였다. 어쩌면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 번째는 아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아내와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며 열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녀들은 그러한 부모의 모습을 보며 사랑과 신뢰, 그리고 봉사와 헌신을 배운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영적인 무장과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의 모범을 보여주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미 목회자 부모와 자녀간에 갈등이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해하는 과정과 같다.

  우선적으로 부모가 먼저 자신들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 자신의 행동과 말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부모 자신의 내면의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을 그렇게 일에 몰두하도록 내모는 내부의 힘의 정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상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깊이 다루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분노가 있다면 그 대상이 누구인가? 무엇 때문인가? 상실감이 있다면 무엇에 대한 상실감인가? 거부감이나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있다면 왜 그런가? 구체적으로 자신은 어떤 양육과정을 거쳐왔는가? 두려움과 지나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있어서 정체감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누구 혹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가?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부정적인 메시지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가 각각 자신들의 내면과 외면의 문제들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진 후 직접적인 화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용서와 보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과정은 조심스럽다. 급하게 서둘러서도 안 된다. 부모와 자녀가 각각 자신들이 내면의 문제를 충분히 다룬 후에 이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상담자나 혹은 중재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화목제물이시며,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하였다.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가정에도 역사 하신다. 비록 지금까지 갈등과 상처와 아픔이 있었을지라도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앞에 설 수 있다면 회복되지 못할 관계는 없다. 이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가정을 날마다 다시 서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