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하나님의 잊혀진 언어-
존 A. 샌포드 지음 / 정태기 옮김
1. 꿈과 나 - 프로이드와의 만남
최근 내가 읽은 꿈에 관한 책은 존 샌포드의 “꿈-하나님의 잊혀진 언어”와 바슐라르의 “꿈 꿀 권리”, 레온 앨트먼의 “성, 꿈, 정신분석” 등이다. 또한 예전에 읽었던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을 다시 훑어보았다. 이러한 책들을 읽으면서 나의 꿈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정리해보았다.
나는 꿈을 자주 꾸지만 그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떤 경우에는 비슷한 내용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 경우도 있다. 사건이나 내용, 등장인물이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장소나 배경이 비슷한 경우도 있다. 그러한 꿈을 꿀 때에는 신비한 느낌이 들곤 한다.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예시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에게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은 아닌지 염려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꿈에 대한 우리 사회문화적인 이해는 꿈이 미래를 예시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리 사회문화적인 꿈에 대한 이해가 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꿈을 이해하는 대표적인 것이 소위 해몽작업이다. 나름대로의 꿈에 대한 해석인데, 대체적으로 보면 정형적인 해석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돼지 꿈이나 죽은 사람이 나타나면 길조이고, 어떤 자신이 죽거나 이가 빠지거나 많이 먹는 꿈은 불길함을 의미하거나 병이 든다는 식의 해석이다. 즉, 꿈에 나타나는 인물, 동물, 사건 등등을 정형화 해놓고 꿈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면 습관적으로 꿈 속에서 무엇을 보았고,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되뇌어 보곤 한다. 심지어는 좋은 일을 바라면서 억지로 길조를 상징하는 꿈을 꾸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러한 영향은 나 개인에게만 미친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속한 교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꿈 이야기를 듣고 예언해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은 드러내놓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서 어쩌면 목회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과정에서 꿈에 대하여 몇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과연 꿈에 대한 이러한 접근들이 옳은 것인가? 특히 교회에서 경험하는 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정말로 꿈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뇌의 어떤 부분의 작용에서 꾸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나의 마음이나 일상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정말 만의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이 프로이드의 꿈에 대한 해석이었다. 그의 “꿈의 해석”을 처음 접한 때는 대학에 입학한 첫해인 1976년 경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답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이드의 꿈에 대한 이해는 매우 흥미로왔다.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찾고자 하는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꿈은 우리의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이며, 마음속에 담겨 있는 소망이나 해결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나 혹은 욕망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현실에서 억압이나 억제되어 충족하지 못한 욕망들을 충족하는 또다른 작업이라는 것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꿈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일차과정을 거쳐서 또 그것을 압축하고 전치하고 상징화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마치 과학적인 어떤 발견과도 같이 느껴졌을 뿐만이 아니라 너무나 정교하고 구체적이어서 마치 수학공식을 풀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때 나는 과학주의에 빠져 있던 공과대학생이었기 때문에 프로이드의 꿈에 대한 이해야말로 나에게는 완벽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이러한 꿈해석을 나에게 적용해 보면 정확하였다. 예를 들면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2년여 동안 한 가지 되풀이되는 꿈으로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 꿈의 내용은 이랬다.
꿈 속에서 나는 어떤 방에서 자고 있었다. 한 참을 자고 있다가 눈을 떠 보면 죽은 아버지가 아랫목에 누워 계셨다. 그 순간 누워있던 아버지가 슬며시 일어나면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왜 좀 더 기다리지 그랬냐?”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꿈에서 깨었다. 그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좋질 않았다. 그런데 이 기분 나쁜 꿈을 2년 가까이 되풀이 해서 꾸면서 정말 괴로웠다. 이 꿈의 의미가 무엇일까? 마음 속에 두고 있던 이 꿈 이야기를 어느 내면치유 강의를 하면서 처음으로 꺼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고, 그 때 내 마음이 어땠고, 이러 저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이후부터 그 꿈을 더 이상 꾸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58세에 사기를 당하셔서 전재산을 잃고 음독자살을 하셨다. 즉각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불명상태에서 병원 중환자실에 27시간을 누워계셨다. 결국 소생할 가망이 없자 인공호흡기기들을 제거해야 했는데, 그 결정을 내가 했었다. 결국 그 꿈은 내 마음 속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련, 그리고 호흡기기들을 떼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 등등을 드러내 준 꿈이었다. 그러한 감정들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순간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었으므로 꿈도 더 이상 꿀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드의 꿈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서 몇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꿈을 단지 무의식에 감추어진 욕망, 이루지 못한 소원, 심리적 갈등 등으로만 치부해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너무 병리적인 측면으로만 보면서 그 중요성을 간과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꿈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더욱 꿈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은 성서 속에 담겨 있는 꿈 이야기들이었다.
성서속의 꿈 이야기들은 매우 간략하지만 대부분이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이 있으며 미래지향적이다. 그 꿈들에게서는 병리적인 측면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한 성서의 꿈이야기의영향은 신자들에게 꿈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과학주의에 빠져 있었던 터이고, 더욱이 프로이드의 꿈 이론에 확신을 두고 있었던 터라 이러한 교인들의 꿈에 대한 태도가 미신적이며 신비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러한 꿈에 대한 해석에 의존하지 말도록 가르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자들은 나와 달랐다. 언제나 꿈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의지했고, 꿈을 통해 미래를 알고 싶어했고, 또한 그 꿈의 이야기를 확신하면서 살아가고자 하였다. 나는 이러한 태도들이 비신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
2. 전환점 - 융, 그리고 샌포드와의 만남
꿈에 대한 나의 이해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다 준 것은 칼 융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칼 융의 꿈에 대한 이해는 프로이드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의 분석심리학이라 이름붙여진 인간 이해 전체가 그랬지만, 꿈은 내면에 숨어 있는 빛과 어두움이라는 양극성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그 통합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며, 나아가 원형을 찾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러한 융의 분석심리학에 충실하면서도 기독적 관점으로 꿈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열어준 사람이 존 A. 샌포드이다. 샌포드는 성공회 신부이다. 신부로서 목회현장에서 많은 신자들을 만나 상담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 신자들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그 꿈 속에 담겨진 메시지들을 기독교적인 전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꿈은 마음 속의 그림자를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인간의 감추어진 진정한 본성을 깨닫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 의하면 꿈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전달해 주는 지적 매체이다. 그리하여 꿈은 그림자와 화해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또한 꿈은 상징성을 통해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의식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나아가 죄의식을 넘어 전인격으로 성장해가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원형을 찾아가는 개성화과정을 잘 수행해 나아가도록 도와주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꿈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샌포드는 꿈과 관련된 상담사례를 통해서 꿈이 지니고 있는 의미들을 성찰한 후에 성서에 나타난 꿈들을 분석하면서 신앙에서 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문제는 양극의 요소들의 문제이다. 그것은 심리학과 종교 둘 다의 문제이기도 하며 성서가 다루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 문제는 또한 영혼을 다루는 정신과 의사나 목사들이 오늘날 직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심층에 계신다. 정신이 창조적 활동을 하며 끊임없이 보다 높은 의식과 고도로 진화된 상태로 나아가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꿈은 양극의 요소들의 문제를 밝혀주며 우리를 치유하여 새롭게 하는 비합리적이며 역설적인 면이 우리 인격에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바로 그 꿈을 던져 버리고 무시하며, 거부하고 두려워한다.” 이 말은 곧 나에게 한 말과 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바로 그 꿈을 던져버리고 무시하며 거부하고 두려워한다!” 샌포드는 더욱 적극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책을 마치고 있다. “꿈은 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자, 즉 인간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만약 이 하나님이 우주의 궁극적 질서, 의미와 같다면, 인간의 꿈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마도 샌포드는 책의 제목 “하나님의 잊혀진 언어”라는 부제를 붙였던 것 같다.
융과 샌포드의 꿈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동안 내 안에 해결되지 않았던 답답함과 교회 안에서 신자들과 더불어 안고 있었던 문제들을 일시에 해결해 주었다. 즉, 꿈은 단순히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나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드러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의 내면의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었다. 나아가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것은 나에게는 일대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또다른 문제와 의문점도 가져다 주었다.
3. 의문과 잠정적 결론
진리 혹은 영원하거나 궁극적인 것은 인간의 언어 자체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이유로 예로부터 우리 사람들은 진리나 영원한 것, 궁극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상징을 통해서 혹은 은유를 통해서 전달하고 깨닫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들은 인간의 의식적인 작업과 그 작업이 수천년 혹은 수백년 되풀이 되면서 구체화되고 정련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화이며 종교적 상징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들이 한 개인의 무의식 속에서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신비하다. 더욱 신비한 것은 그것을 발견해냈다는 것이다. 과연 이 발견이 정당한 것일까? 더구나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언젠가 나의 누님은 다음과 같은 신기한 경험을 전해주었다. 한 작은 회사에 경리로 근무할 때인데, 월말이 되어 결산을 하는데, 대차대조표가 맞지를 않았다. 밤늦게까지 맞추려고 해쓰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계산하는 법을 알려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깜짝 놀라 깨어서 꿈 속 노인이 알려준 방법대로 해 보았더니 수입지출이 딱들어맞더라는 것이었다. 그 꿈은 꿈 속에서 발휘된 누님 자신의 또다른 의식작용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어떤 영적인 계시적 체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일까? 또한 실험심리학적인 결과들을 보면 예시적인 꿈의 경험들은 시간이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서의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부가 한국과 미국에 떨어져 있었는데, 남편에게 어떤 사고가 생겼는데 한국에 있던 아내가 불길한 꿈을 꾸고 나서 전화를 했더니 정말로 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를 당한 시간을 계산해 보니 아내가 꿈을 꾼 그 시간과 꼭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를 보면 어떤 사모님이 교통사고나 나는 꿈을 꾸었는데, 남편이 나가려고 해서 같이 따라 나섰는데, 정말로 교통사고나 났고, 꿈에서 본 대로 색깔도 똑같은 차가 서로 부딪혀 찌그러진 모양도 똑같았아서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이러한 꿈의 경험들은 대체적으로 시간과 모양, 그리고 색감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 개인의 심리를 이해하고 전인격적인 성장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신앙이나 하나님과 관련이 될 때에는 아직도 의문점들이 남는다. 샌포드는 이점에서 너무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꿈이나 환상과 같은 신비현상에 치우친 신앙이 보여주는 부작용들을 너무나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신학과 해석학의 역할이 요청된다. 상징과 은유와 신화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인 툴이 필요하다. 꿈과 환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것을 단순히 한 개인의 차원으로만 한정할 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해석학을 거쳐 신학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개인적 신비주의화의 오류를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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