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오늘 아침에는 한 때 그가 쓴 소설이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명성을 날렸던 한 소설가가 SNS를 떠난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팩스와 전화를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사이버공간을 통한 소통의 방법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그동안 대면하여 강의하던 프로그램들이 점점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그에 상응하는 기술과 방법도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N번방과 같이 나쁘게 사용하여 일어나는 부작용도 많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가 발명하고 발전시켜가는 기술문명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이겠지요.
일방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말이나 감정들을 정신없이 퍼부어대다가 자신이 원치 않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고 더러워서 떠난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글을 쓰면서 매우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친한 친구라 해서, 그리고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막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한없이 넓은 사이버 공간에서 얼굴을 모르면서도 서로 만나 소통해보려는 것은 모두가 공통의 어떤 것을 찾아가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아직은 그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모두가 진실한 마음으로 찾아간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렘29:13, 14a)
<성경통독말씀 살펴보기>
◎ 예레미야는 혼신을 다하여 유다의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여호야김 왕과 고관들은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야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였고, 애굽으로 피한 우리야를 자객을 보내 살해하고 말았습니다(렘26:20-24).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신앙은 맹목적이었고, 바빌로니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무사할 것이라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반대자들에 의해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에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위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예레미야와 함께 하시며, 그의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그를 보호해주셨던 것입니다.
◎ 예레미야 27장은 거짓 선지자와 싸우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다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주변국들과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목에 줄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고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드기야 왕과(렘27:12-15)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렘27:16-22).
바빌로니아에 대항하는 나라는 멸망할 것이며, 반대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 밭을 갈며 거기서 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27:8-11).
그러나, 시드기야 왕부터 시작하여 제사장들과 대부분의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 예레미야 28장은 거짓 선지자 중의 하나인 하나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나라에 위기가 닥쳤는데도 괜찮다 괜찮다고 말하며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에게 거짓 예언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릴 것이며,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 간 주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친히 이 년 안에 이 곳으로 다시 가져 오겠다.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바빌로니아로 잡혀 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렘28:2-4)고 말씀했다고 거짓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또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냐에게 말했습니다.
“아멘. 주님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주님께서 성취해 주셔서, 주님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가 바빌로니아에서 이 곳으로 되돌아 올 수 있기를, 나도 바라오. 그러나 당신은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시오. 옛날부터 우리의 선배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하였소.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님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렘28:6-8)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하는 말을 듣고는 예레미야가 목에 걸고 있던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리면서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년 안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모든 민족의 목에서 벗겨서 이와 같이 꺾어 버리겠다.”(렘28:9)고 말했습니다.
하나냐의 말과 행동을 본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즉시 떠났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너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꺾어 버렸으나, 오히려 그 대신에 쇠로 멍에를 만들고 말았다. 진실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 모든 민족의 목에 쇠로 만든 멍에를 메워 놓고,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수밖에 없다. 나는 심지어 들짐승도 그에게 넘겨 주었다.'”(렘28:13-14).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하나냐 앞에 선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냐는 똑똑히 들으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예언자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도록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이 지면에서 영영 없애 버릴 것이니, 금년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네가 나 주를 거역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렘28:15-16).
결국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목숨을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하나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습니다(렘28:17).
◎ 예레미야 29장은 포로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의 내용입니다.
결국 죄를 돌이킬 줄 모르는 유다 백성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많은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로니아가 금방 멸망할 것처럼 예언하면서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에게 달콤한 말만 전했습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곳에서 예전처럼 평안히 살되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29:10, 11)
<생각해보기>
● 잠언은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만, 뇌물을 좋아하는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잠29:4)
또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잠29:18)고 했습니다.
●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말들도 많습니다.
어제와 오늘도 이런 저런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나라가 위태로우면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바쁜 모습입니다.
마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이 앗수르와 바빌로니아라는 강대한 나라의 위협 앞에 있을 때에 벌어졌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자기의 뜻대로 나라의 권력을 차지하려고 외세의 힘을 빌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요즘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 성경에 속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강대국 틈에 끼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상황이 오버랩 됩니다.
우리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요?
때론 토론도 필요하고 논쟁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당리당략이나 혹은 어떤 특정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공의롭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되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 08. 14. 금요일 아침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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